유튜브 영상의 짧은 댓글 하나가 때로는 한 사회의 사고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양의학은 겉만 치료하지만, 한의학은 근본을 치료한다. 내가 침 맞고 나았으니까.”
묵직한 피로감이 남는다. 병이 나아갈 시점과 어떤 치료 행위가 우연히 겹쳤을 뿐인데, 그 우연은 곧바로 인과로 격상된다. 시간이 지나면 호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플라시보 효과, 자연 회복이라는 설명은 애초에 검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사과가 떨어진 순간 까마귀가 날아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까마귀가 사과를 떨어뜨렸다고 믿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 댓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다 보니, 이 문제는 특정 의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과관계를 다루는 방식 자체에 내재된 오래된 오류라는 생각이 든다. 설명되지 않은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우연에 의미를 부여해 안도하려는 본능. 안갯속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이 손에 잡히는 첫 대상을 길이라 믿고 매달리는 모습과 닮아 있다.
사람은 설명보다 위로를 먼저 원한다.
그 본능이 이성을 밀어낼 때, 믿음은 쉽게 미신이 된다.
그들이 쉽게 폄하하는 현대의학은 인류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가장 냉정한 지성의 산물이다. 현대의학은 증상을 덮는 기술이 아니라, 원인을 추적하는 방법론에 가깝다. 바이러스와 종양, 유전자처럼 불편한 실체를 데이터와 검증으로 파고든다. 땅 위에 고인 물웅덩이를 말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왜 그 자리에 물이 고였는지를 묻는 일이다.
물론 현대의학이 모든 병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하는 것과, 애초에 원인을 묻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르다. 현대의학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그 무지를 줄이기 위해 실패와 수정을 반복한다. 나는 ‘근본 치료’라는 듣기 좋은 추상어보다, 이 미완의 태도가 더 윤리적이라고 느낀다. 완성되지 않았음을 숨기지 않는 지도 한 장이, 그럴듯하게 꾸며진 가짜 지도보다 훨씬 멀리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이 인과의 착각은 개인의 인식에서 끝나지 않는다. 국가 정책으로 옮겨지는 순간, 그 파장은 커진다.
지역의사제를 둘러싼 논의가 그렇다. 지방에 의사가 부족한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인구는 줄었고, 환자는 사라졌으며, 의료 인프라는 시장 논리 속에서 버티기 어려워졌다. 이것은 불편하지만 외면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럼에도 정책은 이 구조를 건너뛴 채, 의사를 일정 기간 묶어두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환자가 없는 곳에 의사를 심어두면 의료가 살아난다는 발상은, 물이 마른 강바닥에 다리를 먼저 놓고 사람들이 건너오지 않는다고 다그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흐름을 바꾸지 않은 채 구조물만 세운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의료 정책을 넘어 정치의 작동 방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결정들은 대부분 국민이 직접 뽑은 정부에 의해 추진된다. 그럼에도 정책의 결과가 실패로 돌아왔을 때, 책임을 명확히 지는 주체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표는 집단으로 행사되지만, 결과의 부담은 흩어진다. 현대 민주주의는 결정을 정당화하는 절차에는 익숙하지만, 그 결정이 낳은 부작용을 제어하거나 되돌리는 장치는 놀라울 만큼 허술하다. 그래서 합리성보다 상징이, 구조적 해결보다 즉각적인 위로가 선택되는 장면이 반복된다.
보다 합리적인 접근은 시장과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의사의 이동을 통제하려 들기보다, 환자의 흐름을 바로잡는 것이다. 지금처럼 감기 하나에도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직행할 수 있는 구조에서는 지방 병원이 설 자리가 없다. 이는 모든 물길을 한쪽으로만 틀어놓고, 다른 곳의 강바닥이 마르는 것을 탓하는 일과 비슷하다.
동네 병원에서 시작해 지역 거점 병원, 그리고 정말 필요한 경우에만 대형병원으로 이어지는 의료 전달 체계를 정상화하지 않는 한, 어떤 인력 정책도 공허해진다. 지역 병원을 거치지 않으면 보험 혜택을 크게 줄이는 방식으로 환자가 지역에 머물도록 만들면, 의사는 강제로가 아니라 생존과 수익을 위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바람을 거슬러 새를 던지는 대신,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보상 역시 솔직해야 한다. 시골이나 기피과에서 일하는 것은 분명히 고되고 위험 부담도 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대가는 압도적인 금전적 보상이나 세제 혜택으로 치러지는 편이 가장 정직하다. ‘돈으로 꼬신다’는 비난은 공허하다. 험한 산길을 오르는 사람에게 더 튼튼한 신발을 쥐여주는 일이 왜 부정의가 되는지, 그 질문부터 다시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런 대안들이 실제로 채택될 것이라 낙관하지는 않는다. 정책은 종종 합리성보다 상징을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개인에게로 돌아온다.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완전히 내려놓는다기보다, 그 기대가 언제든 어긋날 수 있음을 전제로 삼는 편이 현실적이다.
대중은 감성에 취약하고, 나 역시 그 범주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뉴스나 정책을 마주할 때, 한 박자 늦춰 의도를 묻고 인과를 점검하려 애쓸 뿐이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생각이 생각 없이 흘러가버리는 순간을 조금은 늦춰준다. 그 정도의 거리 두기만으로도 삶은 덜 소모된다.
시스템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는 노력 역시 거창한 결심이라기보다는 소극적인 대비에 가깝다. 경제적 자립이든, 내 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든, 어디서든 버틸 수 있는 기술이든 간에, 그것들은 자유를 선언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다. 선택지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가깝다.
다만 이런 태도가 쉽게 냉소로 기울 수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 한다. 모든 문제를 ‘미성숙한 대중’ 탓으로 돌리는 순간, 사유는 편해지지만 얕아진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렇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면죄부가 아니라, 불필요한 분노를 덜어내기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비를 탓하며 하늘에 소리치기보다, 조용히 우산을 드는 편이 오래간다.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구멍투성이다. 그 구멍을 모두 메울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이 혼란 속에서 나 자신만큼은 속이지 않으려 애쓰는 태도 말고 다른 결론을 찾지 못했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선언 대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인과를 묻고, 흐름을 의심하고, 쉽게 위로받지 않으려는 습관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성을 쌓는 일인지, 임시로 몸을 숨길 벽 하나를 세우는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바람이 불 때마다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돌 하나를 고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