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선'

by 노경문

특수절도 사건의 피해자가 된 순간보다 더 당혹스러웠던 건, 경찰 조사가 끝나고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던 날이었다.


주범인 외국인 청소년 요셉이 보낸 SNS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반성문 대신 보이는 건 현금 뭉치 사진 한 장이었다.

​순간 치밀었던 분노가 가라앉자 그 자리에 남은 건 묘한 씁쓸함이었다. 그는 ‘미성년자’와 ‘외국인’이라는 신분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믿음 속에서 악의보다는, 규칙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서툴게 세상을 견디는 어린 영혼의 낯선 오만함을 보았다.

​요셉은 물건을 훔친 뒤, 마치 계산을 마친 사람처럼 태연했다. 훔친 것을 어린 동생들과 친구들에게 선심 쓰듯 나눠주기도 했다. 그는 규칙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규칙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보였다.

​며칠 뒤, 우연히 미국 미네아폴리스의 소말리아 이민자 공동체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전쟁과 기근을 피해 낯선 땅에 정착한 이들이 서로를 감싸며 만든 작은 울타리. 그들의 처절한 생존 본능은 때로 제도의 빈틈을 파고드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 장면들은 자연스럽게 요셉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에 오래 살았지만 한국어를 못 하는 부모, 아랍어로만 대화해야 하는 집. 가끔 그가 한국어로 긴 문장을 이어 말할 때면 스스로 대견해하며 스치듯 짓던 그 표정이 떠올랐다.

말 한마디 편히 붙이지 못하는 언어의 장벽 뒤에 숨어 지내는 수많은 이민자 아이들처럼, 요셉도 늘 그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자라온 듯했다.


​그는 한국 사회라는 문턱 앞에서 언제나 한 발만 올려둔 채 망설이는 경계인이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문을 닫는 순간 다시 모국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는 삶.

내가 느꼈던 ‘약자의 오만함’도 결국,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두른 서툰 갑옷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을 단순히 ‘아이의 잘못’으로만 읽지 않기로 했다. 이는 아이의 실패라기보다, 이민자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돕지 못한 우리 사회 동화 시스템의 실패에 가깝다. 어쩌면 이 사건의 진짜 피해자는, 방치된 요셉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해가 곧 용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사정을 무작정 봐주는 관계는 공존을 무너뜨린다. 우리가 지켜야 할 ‘선’이 명확해야 하고, 그 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될 때 비로소 사회는 안전해진다.
​우리가 약자를 보호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이 특권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곳에서 시민으로 자리 잡아, 언젠가 우리와 똑같이 책임을 나누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가 면죄부로 둔갑하는 순간, 그들은 영영 우리 사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주변부를 맴돌게 된다.


요셉이 나에게 보여준 돈 사진은 그가 아직 ‘함께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슬픈 신호였다. ​그래서 나는 법원에 강력한 처분을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복수심이 아니라, 이 아이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선택이었다. 자영업자이기 이전에 어른으로서, 그가 이곳에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사회가 너를 미워해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마지막 가르침이길 바랐다.


​나의 단호함이 부디 그에게 닿기를.

법의 준엄한 꾸지람이 그가 두른 오만의 껍질을 깨고, 그 안에 숨어 있던 불안한 소년을 세상 밖으로 꺼내주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가 ‘보호받는 약자’라는 좁은 범주를 넘어, 스스로 책임을 지는 당당한 이웃으로 성장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이 뼈아픈 예방주사가 배척의 칼날이 아니라, 진정한 공존을 위한 문을 여는 작은 열쇠가 되기를 바란다.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