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된 관점들을 모아 진실을 보는 방법
우리는 매일 아침 하나의 세상 속에서 눈을 뜬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트럼프의 거친 독설 한 조각, 멕시코 카르텔의 잔혹한 영상 한 조각, 굶주린 베네수엘라 아이의 눈물 한 조각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다.
미디어는 이것들을 각각의 파일로 분류해 우리에게 건넨다. 이건 정치, 저건 범죄, 저건 인도주의적 비극이라고. 당신은 그 분류를 의심하지 않은 채 스크롤을 내린다. 그 순간 이미 이 설계물은 한 번 작동을 끝냈다.
우연일까.
선진국의 미디어와 기득권이 세상을 이렇게 쪼개 보여주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체를 보여주는 일은 돈이 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체를 보여주는 일은 위험하다.
대중은 15초짜리 자극에는 즉각 반응하지만, 수십 년에 걸친 구조적 모순에는 피로를 느낀다. 분노는 소비되지만, 연결은 질문을 만든다. 질문은 언제나 불편하다.
멕시코 카르텔을 잔혹한 악으로만 바라볼 때, 우리는 이상할 만큼 편안해진다. 분노하고 혐오한 뒤 화면을 닫으면, 할 일은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한동안 그 편안함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카르텔을 키운 거대한 마약 수요와 총기 자본,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과 소비 구조를 함께 보기 시작한 순간, 감정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뉴스가 아니라, 내가 속한 시스템의 일부로 다가왔다. 그때 비로소 이해했다. 시스템이 악을 늘 외부에 배치하는 이유를. 우리는 악을 구경하는 역할을 맡는 순간 가장 똑똑해 보이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책임은 증발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생존을 위해 남을 파괴하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 질문은 너무 늦다.
멕시코와 베네수엘라의 민중에게는 오랜 시간 누적된 르상티망, 반복된 배신과 좌절이 남긴 감각이 있다. 국가라는 보호자가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확신이 굳어지는 순간, 도덕은 교과서 속 문장이 된다. 법은 추상이고, 나를 먹여 살리는 존재만이 현실이 된다.
그들에게 마약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지이자 생존 방식이며, 자신들을 외면한 세계에 되돌려주는 방식의 응답이다. 이 정서를 보지 못한 채 그들을 야만으로만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구조가 가장 좋아하는 결말을 완성한다. 타자화. 문제를 멀리 밀어내는 가장 효율적인 기술이다.
이 메커니즘을 읽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차가운 분석과 뜨거운 공감의 동시 작동이다. 트럼프가 카르텔을 대량살상무기 수준의 위협으로 규정하는 장면을 도덕적 분노로만 해석하는 것은 쉬운 길이다.
내가 읽어온 정책 흐름과 국제 정세 속에서는, 그것이 멕시코와의 무역 협상, 국경 통제, 그리고 중남미를 경유해 스며드는 중국 자본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적 수로에 가깝게 보인다. 물론 이런 해석은 시점과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언제나 다양한 시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해석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다. 이런 연결을 상상조차 하지 않는 사고 습관이 문제다.
동시에 그 계산된 수싸움 아래에서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면, 분석은 잔인해진다. 반대로 고통만 보고 구조를 읽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든 감정의 소비자가 된다. 이성과 감성이 함께 작동하지 않는 순간, 당신은 미끼를 문다. 분노든 연민이든, 방식만 다를 뿐 결과는 같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런 정보에 즉각 반응하지 않으려 애쓴다. 솔직히 말하면, 한때는 나 역시 분노했고 연민했다. 그 감정이 옳다고 믿었고, 그것으로 충분히 생각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왜"라는 질문이 빠진 분노는 누군가에게 너무 편리하게 쓰이고, "누구의 이익인가"라는 질문이 생략된 연민은 결국 소비되고 버려진다는 것을.
연결되지 않은 정보는 진실이 아니라,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재료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것은 행동 지침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점검하기 위해 세운 생각의 기준이다.
내가 투자를 공부하고 세상을 구조적으로 읽으려 부단히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돈은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올곧음이라는 기준 위에, 내가 직접 겪으며 그린 현실의 지도를 덧씌워 판단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앞으로 아이들이 마주할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정교해질 것이다. 그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어떤 정보에 반응하지 않을지를 아는 감각이다.
흩어진 파편을 모아 "왜"라는 질문과 "누구의 이익인가"라는 질문으로 꿰매는 것. 이 연결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같은 역할을 반복할 것이다. 다만 점점 더 똑똑해 보이는 얼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