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한나 아렌트 (H) – 철학자, 정치사상가.
나 (N)
아이히만 (E) – 전범 재판을 받는 피고인.
판사 (J)
(어둠 속 조명이 천천히 밝아진다. 법정 한 가운데 피고석 아이히만이 앉아 있고, 재판장 위에는 판사가 서 있다.)
(예루살렘, 1961년. 최후 진술과 판결 선고)
E: (덤덤하게) 저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감정은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저는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정적. 판사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린다.)
J: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죄입니다. 당신의 손이 아니라, 무관심이 수백만을 죽였습니다. 국가는 명령했지만, 양심은 침묵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 이 법정은 당신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아이히만은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관객을 향해 혼잣말처럼 말한다.)
E: (어딘가 허탈하게)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정말, 그게 벌을 받아야 할 이유입니까?
(방청석의 웅성거림. 조명 꺼짐)
나레이션: 역사는 잊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은 종종, 권력의 손에 휘둘린다. 우리는 오늘, 한 재판의 잔해 위에서 묻는다. 악은 언제 어디서 자라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생각하고 있는가?
(조명 켜지며 무대 위 서로 마주 앉은 두 인물이 드러난다.)
N: (잠시 침묵)아렌트 선생님, 아이히만을 보며 정말 평범하다고 느꼈나요? 그는 수백만을 죽게 만든 사람이잖아요.
H: 네, 그는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것은 악이 얼마나 일상 속에 숨어 있는지를 말해줬죠. 그는 복종했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N: 하지만 그걸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마치 철 없는 이의 실수처럼 들려요. 죄의 무게가 줄어든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H: 전혀요. 오히려 그 반대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자신을 도덕적 행위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더 위험한 악입니다.
N: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자가 아니잖아요. 고된 삶 속에서 체제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게 잘못인가요?
H: 저는 누구나 사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철학자가 아니라도, "이건 옳은가?"라는 질문 하나는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N: (조금 더 단호하게)당신은 생각의 힘을 믿죠. 전, 감정의 무게를 믿습니다. 체제에 복종해버린 수많은 사람들도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했던 거예요.
H: 그 감정이 이해는 가지만, 그 역시 물어야 할 문제입니다. 감정에 휩쓸릴 때조차, 한 번은 물어야 합니다. "이건 괜찮은가?"라고요.
N: 그럼 그 질문 하나 던지지 못한 이들은 모두 책임이 있단 말인가요?
H: 책임은 있습니다. 작더라도, 묻지 않은 데 대한 책임. 체제에 의해 살지만, 체제를 되묻지 않는 인간이 가장 위험한 법이죠.
N: 흠..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사건 기억하시죠? 당시엔 테러리스트였는데 지금은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들도 체제에 의해 정의가 바뀐 거 아닌가요?
H: 맞습니다. 정의는 종종 권력에 의해 쓰이죠. 그러나 개인의 사유는 그 너머에 있어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는 남습니다.
N: 그건 너무 이상주의적이에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입니다. 군중 속에서 안정을 찾고, 사유보다 생존을 택하죠.
H: 그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사유입니다. 사유는 인간을 인간이게 합니다. 우리가 사유를 멈출 때, 악은 자라죠.
N: 하지만 결국, 사유의 힘은 당신 같은 사람의 것이잖아요. 우리 대부분은 끝까지 질문을 이어가지 못해요.
H: 그렇다면 더더욱, 한 번의 질문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작은 질문이, 악을 멈추는 시작일 수 있어요.
(따뜻해진 조명. 사이 짧은 침묵.)
N: 만약 그때 그를 막지 못했다면.. 지금은 다를까요? 지금 우리는, 악의 씨앗을 눈앞에서 알아볼 수 있을까요?
H: 그건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가에 달렸죠.
(조명이 꺼지고 스포트라이트가 H를 비춘다.)
H: 아이히만은 죽었다. 재판은 끝났다. 그러나 그 자리에 다시 누가 앉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악은 소리 없이 시작된다. 회의실에서, 문서 속에서, 침묵한 평범한 얼굴 안에서.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그 말은 두려움이 아닌, 기억하라는 명령이다.
지금, 당신은 생각하고 있는가?
그 한 줄기 질문이 꺼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명이 꺼진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