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MZ, 아버지 사이의 침묵

by 노경문

우연히 스토리를 들었다.
익숙한 풍경이 그려졌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한 노부부가 음식점에 들어섰다.
"주문 좀 할게요," 조심스럽게 말하자
젊은 아르바이트생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곧장 말했다.

"키오스크 이용하시면 됩니다."

할머니가 다시 한 번 부탁했다.
"눈이 침침해서 그런데, 좀 받아주실 수 없을까요?"

알바생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어렵지 않아요. 가서 한번 해보세요."

키오스크 앞에서 한참을 고생하던 노부부를 지켜본 건
옆자리에 앉은 40대 중년 남자였다.
그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냥 좀 도와드리면 안 돼요?"

결국 노부부는 어렵게 주문을 마쳤다.
하지만 실수가 있었고, 주문 취소를 요청하자
알바생은 말 없이 벽에 붙은 안내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키오스크 주문은 절대로 취소 불가합니다. 신중히 주문해 주세요.”

분노는 퍼졌다.
하지만, 사람마다 분노한 이유는 달랐다.

어떤 이는 말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키오스크 하나 못 써? 배우셔야지."

또 다른 이는 말했다.
"저 알바생, 너무 싸가지 없다. 도와줄 수 있잖아."

노부부는 말없이 잘못된 음식을 받아들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들 안에
가장 깊은 체념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같은 장면을 보고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유로 마음을 끓일까.

어쩌면 우리의 싸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어디를 보고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도 MZ세대라 불리는 나이에 있다.
하지만 요즘의 20대 초반,
직영매장에서 함께 일하는 알바생들을 볼 때마다
작지 않은 간극을 느낀다.

그들은 빠르다.
자신을 지킨다.
말을 아낄 줄 모르고,
역할 이상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 설문 조사에는 서비스직은 친절해야 한다는 데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본인이 알바할 땐
“최저임금 주면서 뭘 더 바라냐”고 말하면서.

책임은 가볍게 지고 싶고,
대우는 확실히 받고 싶다.

그 심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기에 더 조심스럽다.
나도 때로 그 안에 있었고,
어쩌면 아직도 그 언저리에 있다.

문득,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는 늘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뎌냈다.
사랑이든 고통이든, 표현보다는 침묵으로 감당했다.

나는 그걸 답답해했고,
때론 확신이 들지 않아 애가 탔다.

그런데 이제,
다른 방식으로 침묵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애쓴다.

무뚝뚝한 사랑도,
무표정한 존중도,
말 없는 배려도
사실은 나름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나도,
어떤 세대와도 완전히 닿지 못한 채
중간 어딘가에 서 있다.

그 자리는
조금 외롭지만,
세대를 잇는 다리 같은 자리다.

친절은 종종 상처로 돌아온다.
배려는 오해가 되고,
도움은 무시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심하다가,
조심조심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그 마음을 안다.
나도, 여러 번 그런 마음을 느꼈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남에 대한 친절이, 결국 나를 위한 온기라고 믿고 싶다.

언젠가 돌아올 희망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내 삶이 사막이 되지 않도록
내 안에 물을 주는 일이라면.

그렇게,
오늘도 나의 속도로
천천히 살아가고 싶다.
그래야 아들에게도 떳떳할 것 같다.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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