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는 뒤늦게 배운 감정이다.
날 때부터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망과 배신이 반복되면, 기대부터 거두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깨닫는다.
누구나, 어떤 순간엔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냉소적인 사람일까?
단정하긴 어렵지만,
어떤 주제 앞에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젓곤 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따듯함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늘 헷갈린다.
사람들은 냉소적인 사람을 흔히 이렇게 정의한다.
비관적이고, 삐딱하고, 감정에 인색한 사람.
타인의 동기나 세상의 선의를 쉽게 믿지 않는 사람.
그 말들에는
공감보다 거리두기, 희망보다 의심이 먼저 배어 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냉소는 사실, 꺾인 신뢰 위에 피어난 감정의 방어막이다.
그들은 감정을 모르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한때 깊이 믿었고, 그만큼 더 많이 실망했던 사람들이다.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흥미로운 연구 하나를 접했다.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진행된 연구였는데,
냉소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일수록 평균 소득이 낮다는 결과였다.
연구팀은 냉소가 협업과 신뢰 관계 형성을 방해하고,
그 결과 사회적 자산이 줄어들며 결국 경제적 손실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냉소를 하나의 원인이라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설명을 듣는 내내,
가슴 한켠의 불편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이 냉소적이기 때문에 가난한 걸까?
아니면, 가난하고 반복적으로 무시당했기 때문에 냉소적이 된 걸까?
어쩌면 이 연구는,
결과를 원인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의구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애초에 소득이 낮은 환경에서는 높은 확률로
불공정, 차별, 박탈, 배신 같은 경험이 반복된다.
그 경험은 어느새 “사람을 믿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냉소는 어쩌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쌓은 마지막 성벽처럼 말이다.
심리학 연구에서는 냉소적인 사람의 기준을 측정하기 위해 특정 문항을 나열한다.
“사람은 결국 자기 이익만을 좇는다.”
“정직하게 살아봐야 손해다.”
“이 사회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냐?”
이러한 문장에 얼마나 동의하는지를 수치화해 ‘냉소 성향’을 계산한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그 문장에 동의한 사람들은 정말 냉소적인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삶을 살아온 것인가?
신뢰는 자본이고, 따뜻함은 여유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삶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조심하는 것뿐이다.
냉소는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 속에 반복된 기억이 만든,
삶의 습관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떤 주제에선 냉소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냉소는, 그가 지나온 시간의 압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함부로 단정하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를 냉소적인 사람이라 부르기 전에,
그가 그렇게 변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먼저 떠올려본다.
그가 정말 냉소적인가?
아니면,
우리가 먼저 그의 마지막 기대를 꺾은 혹은 꺾으려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