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에서 방영했던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들을 몇 편 다시 보았다. 언제 봐도 새롭고 흥미롭다.
그러나 오늘은, 전쟁 자체보다 그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들의 내면과 선택이 궁금해졌다. 그들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고, 무엇을 믿었을까.
각기 다른 역사 속의 자리에서 그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한 가지 물음이 생겨났다.
“누가 인간의 존엄을 지켰는가.”
그 물음은 처음엔 윤리적인 척 보였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옳은 판단과 그른 판단을 가려내려는 기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그 질문이 가진 무력함과 불편함이 드러났다.
역사 속 인물들을 떠올렸다.
도조 히데키, 아돌프 아이히만, 오스카 쉰들러.
누구는 희대의 전범으로 죽었고, 누구는 평범한 악으로 지목되었으며, 또 누구는 인류의 의인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사고와 조건 속에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누가 진정 옳았는가를 말하는 일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시대가 다르고, 맥락이 다르고, 그들이 짊어진 감정과 책임이 너무 다를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을 재단할 수 있을까?
아니, 정말 정당한 질문은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결정을 미루는 것도,
무책임하게 중립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멈춰 서고, 더 나은 쪽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일이다.
그런 물음이 진심이라면, 삶은 조용히 달라진다.
나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말의 무게를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고, 누군가를 함부로 단죄하지 않게 되었으며, 섣불리 옳고 그름을 가르려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내 자리를 가볍게 살지 않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고, 가장 구체적인 실천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자로 남는 것.
그리고 그 인식의 흐름을 바탕으로 오늘을 다르게 사는 것.
그게 지금 내가 선택한, 나만의 방식이다.
[한나 아렌트와의 두 번째 가상 대화]
나는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저는요… 도조 히데키도, 아이히만도, 쉰들러도… 그들 모두를 선악의 틀로 단정하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그들의 선택엔, 각자 나름의 이유와 맥락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자세히 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쉽게 비판할 자신도 없어요.”
차분히 내 말을 듣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연다.
“그렇군요. 당신은 단죄보다 이해를 먼저 두는 겸손을 택했군요.”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말한다.
“비판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단지, 그걸 너무 쉽게 해버리는 시대가 두려워요. 악행을 무작정 옹호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절대 선하다고 믿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를 묻고 싶어요.”
한나 아렌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민이 진심이라면, 저는 비판하지 않아요. 다만 하나만 물을게요. 그 질문의 끝에서, 당신은 무엇을 실천하고 있나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한다.
“사람을 쉽게 단죄하지 않으려는 태도요. 말의 무게를 더듬으며, 눈앞의 삶에 책임지려는 마음. 아주 작지만, 삶 속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실천 중이에요.”
아렌트가 마지막으로 답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인간으로서 책임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때때로 판단보다 더 큰 존엄을 지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