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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Jun 21. 2020

[독서 기록] 여행자의 일기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김영하의 시칠리아>를 읽고


이사 후, 이용 중인 도서관은 전과 달리 신간 도서가 빠르고 많이 들어온다. 하지만, 신간답게 늘 예약자 수까지 꽉꽉 차 있어서 번번이 예약도 못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 예약 도서가 내 순서로 돌아왔다는 문자가 왔다.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김영하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었다.

알쓸신잡을 보고 '김영하'라는 사람이 쓰는 글이 궁금해졌고, 그의 에세이 스타일이 나에게 잘 읽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행의 이유>가 재미있었던 만큼,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큰 기대를 갖고 읽은 책이었다. 기대치가 컸던 탓인지, 내 기대만큼 잘 읽히진 않았다. 이전 독서 때와 달리 바빠진 상황 탓도 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내용들이 나오면 나는 어떤 글이든 읽기 어려워하는데 이 책에서 그리스 신화 나오는 부분마다 나는 어려움에 글자에서 가출했다. 이런 부분에 거부감이 없는, 지식이 쌓여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많은 것을 남기며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읽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더라도, 나는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추천하고 싶다. 한동안 언제 자유롭게 떠날지 모르는 현 상황에서, 떠나고 싶은 욕구를 여행 에세이로 푸는 것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행기에 나오는 '시칠리아'는 마치 가상현실 같다. <태양의 후예>의 우르크처럼,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누군가 잘 적고 사진으로 남겨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시칠리아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하는 글이라는 이야기고, 시칠리아행 기차에 오르고 싶게 하는 글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으며 여행을 꿈꾸기도 미안한 지금 절대 풀 수 없는 나의 여행 욕구를 잠재울 수 있었다. 대리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누군가 내 앞에 앉아 "시칠리아를 왜 갔냐면 말이지." 하고 말을 꺼내 한두 시간 끊이지 않고 이야기를 해준 기분이 들었다. 그 시간을 여행 간 셈 치자 싶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무래도 제목과 관련 있는 부분이었다.

"그럼 혹시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 없었어요?" PD가 물었다.
"시칠리아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 같았다.
- 첫 만남

이 부분을 읽으면, 내가 작가였다면 어떤 대답을 했을까 생각해봤다. 바로 '스페인'이 떠올랐다. 이전에 어느 글에선가 밝힌 적이 있는데, 2018년의 퇴사 여행은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을 보고 결정되었다. 행선지가 스페인은 아니었지만, 퇴사 결정과 여행에 큰 공을 세운 예능이었다. 반복해서 본 그 예능에서 그려지는 스페인은 예뻤다. 일순위 여행지가 없었다면 스페인을 행선지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다녀오지 않은 편이 나았다고 생각한다. 그곳은 내 기대와 환상으로 채워진 나라다. 나는 그곳에서의 행복만을 그려보았다. 여행이 쉬울 리 없고, 방송과 현실이 같을 리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스페인을 가고 싶으면서도 가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 없었어요?"에도 '가고 싶지 않은 여행지는 없나요?"라는 질문에도 "스페인이요."라고 답할 것 같다. 이 대답이 내가 오래 준비해온 답 같았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은 한 마디 글귀였다.

어느새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의도야 아니었겠지만, 글을 보자마자 푹 찔린 느낌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뭘까. 긍정적인 의미일까, 부정적인 의미일까. 어느새 되어 버린 나의 형태는 무엇일까. 말은 한마디였는데, 생각은 여러 갈래가 되어 퍼졌다.
나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는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개념을 정의 내리는 것을 어려워하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의는 좋을 것 같지 않아서다. 아쉬운 부분만 생각날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하기엔, 현실을 살아낼 힘도 부족한 지금이기에 조금 더 긍정적인 내가 되었을 때 생각해 보겠다.

긴 여행을 떠날 때마다 일기를 적었다. 나의 일기는 이런 수작이 될 수야 없겠지만, 개인적인 의미로라도 남길 수 있게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보고 싶다. 언젠가 떠날 다음 여행을 위해 묶지 않아 왔던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지금 묶이기 좋은 시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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