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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Mar 11. 2020

알쏭달쏭한 신비의 도시 이스탄불

무섭고도 신기한 이스탄불의 단상


2012년, 이제는 수업 이름도 가물가물한 교양 수업(그리스 신화에 대한 수업)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지금 20대죠? 그렇다면 지금부터 언젠가 한 번쯤은 그리스로 넘어가는 바다 위를 떠가는 유람선을 탈 일이 있을 겁니다. 지금 제 말이 허황되다고 느끼시겠지만 이건 진심이에요."


지금 다시 쓰면서도 거짓말 같은 말인데, 이 말을 듣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 교수님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교.. 교수님 그리스 바다를 정말 보게 됐어요! (출처 : 개인 소장)


자랑 아닌 척 자랑하자면 나는 대학을 7학기 만에 졸업했고, 교수님의 말을 들었을 때는 졸업 전 마지막 학기만을 남겨둔 때였다. 대학생으로서 여행을 떠난다면 바로 지금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맘때 나와 가장 친했던 대학 동기는 오랜 동아리 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친구 말에 따르면 오랜 시간 했던 만큼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던 자리에 있어서 즐거웠던 만큼 피로했다고 했다. 기말고사 준비를 위해 친구 방에 함께 앉아 있던 우리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지금 우리가 떠날 때다!'라는 것에 의기투합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교수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야, 오늘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 살면서 평생 중 한 번 우리 모두는 그리스를 가게 될 거래. 웃기지 않니?"

"그럼, 우리 이번에 그리스를 가자!"

"...... 내 이야기 들었니?"

"가면 되지! 교수님 말 잘 들어야지! 우린 학생이잖아."


언제부터 교수님 말을 그렇게나 잘 들었다고.

아마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 함께 들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가 뭐든 떠나고 싶었던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여행 이유에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런데 그 먼 데까지 가면서 그리스만 가는 거는 아깝지 않아?"

"그렇지? 다른 나라도 하나 끼우자!"


아니, 얘들아 그러지 마. 너희 한 달 후에 너희의 저질 체력에 아주 많이 후회할 거야.


다 지나고 온 후,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만 이때의 철부지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여행의 청사진만을 그렸다. 그때, 추가된 나라가 터키였다. 



광장에서 바라본 블루모스크-이보다 희박했던 터키 지식- (출처 : 개인 소장)


정확히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 것 보면 인접국이라는 이유와 우리 둘 중 누군가의 지인이 다녀와보니 좋다고 하였을 것이다. 기말고사를 보며 출발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여행을 준비했다. 친구는 그사이 가족 중 누군가 상을 당해 지방을 가기도 했다. 정제하여 말했지만, 여행 준비 하나 제대로 안 하고 그 먼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그나마 나았다. 여행을 위해 가이드북을 사왔다. 나는 그것마저 비행기 안에서 읽는 준비되지 않은 여행자였다. 그렇게 나는 이스탄불에 떨어졌다.


이스탄불의 첫 느낌은 '향신료'였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코를 찌르는 향신료의 냄새 때문에 나는 친구를 두고 비척비척 먼저 길을 앞섰다. 공항에서부터 읽을 수 없는 문자와 마주했고, 이곳이 터키라는 외지이긴 하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이스탄불을 제대로 구경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이동 일정이 꼬인 탓에 첫날은 이스탄불 호텔만 들렀다 갔다. 산토리니와 아테네를 구경하고 난 후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그것도 아침 7시에.


우리는 대학생이었고, 여행비를 부모님께 빌려왔다는 부채감에 이동비를 아끼겠다며 아테네에서 이스탄불로 넘어오는 수단을 야간 버스로 결정했다. 예약을 할 때는 국경을 버스로 넘는다는 신기함과 설렘이 있었다. 실제로는  불편함만이 가득했다.  만석 버스라 등받이를 눕히지도 못했고, 가득 찬 짐칸 때문에 캐리어를 앞좌석과 내 좌석 사이에 욱여넣고 다리를 그 위에 접어 올린 채 열몇 시간을 운행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야간 버스를 타기 전 휴대전화까지 잃어버린 다음이라 기분마저 구렸다. 그 상태로 전날 오후 4시에 버스에 올랐고, 이스탄불에는 새벽 동이 틀 때쯤 도착했다.   


마음도 몸도 피곤했을 때여서 그 불편한 상태에서도 잘만 잤다. 그런데 갑자기 크루가 우릴 깨웠다. 입국 심사를 해야 하니 여권을 달라고 했다. 여권을 주고 다시 잠에 들었다.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우, 미안해요. 여권 다시 줄게요. 입국 심사는 내려서 직접 받아야 한대요. 차 근처에 세워둘 거니까 도장받고 다시 차로 오세요."


'입국 심사. 그래, 여기가 버스라 그렇지 나 타국에 가고 있는 것이었지?'


자다 깨서 힘들었으나 입국 심사가 금방 끝난다는 이야기만 믿고 점퍼도 아닌 담요만 두른 채 나가서 입국 심사를 받았다. 얼굴만 보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크루의 말대로 입국 심사는 간단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버스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다른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니, 앞쪽에 작은 건물 불빛이 보였고 버스는 그곳에 있었다. 크루는 그 앞에 있었다.


"여기서 화장실 갔다가 타시면 되어요. 아, 여기 듀우티-프으리-(면세점)이니까 쇼핑하시고요. 듀티 프리! 듀티 프리!"


1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경험 중 이게 아직도 선명한 색을 지니고 있는 것 보면, 아주 충격이었나 보다. 어찌 되었든 그 충격적인 면세점을 지나 나는 이스탄불에 왔다.


새벽에 도착한 이스탄불 차고지 (출처 : 개인 소장)



새벽 동틀 녘에도 목이 말랐고, 친구를 앉혀두고 음료수를 사러 갔다. 자리에 돌아오니 친구가 홈리스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며 퍽치기당할까 무섭다고 했다. 붉은 해가 뜨는 이스탄불의 시작은 당황과 무서움으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관광 중심지로 이동하기 위해 트램을 탔다. 그런데 하필이면 출근 시간과 겹쳤는지 만원이었다. 캐리어 두 개와 우리의 두 몸을 끼워 넣고, 나보다 왜소한 친구는 몸만 내리고, 나는 캐리어를 양손에 끼고 내리기로 했다. 우리가 내려야 할 역에 왔고 나는 캐리어를 들고 내렸다. 그리고 옆을 살폈는데 친구가 없었다. 친구는 여전히 트램 안에 있었다. 게다가 문이 닫히려고 했다. 나는 휴대전화가 없는 상태였고, 짐은 내가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트램 문이 닫히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발 하나가 들어왔다. 아무 말도 안 했건만, 눈치껏 우리의 상황을 알아본 형제께서 문을 잡아준 것이다. 그리고 친구를 출근길 지옥철에서 빼내어 주었다. 그때 이스탄불의 인상이 조금 친절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트램에서 내린 후 (출처 : 개인 소장)



그때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지만, 이스탄불에서 박물관이나 성당에 들어가려면 몸수색이 필수였다. 어디든 한 번 나갔다 오면 짐 검색부터 몸수색을 다 받아야 했다. 가방, 힙색, 점퍼를 다 벗어야 했고, 안내문에는 '총이나 총알 등을 들고 오지 마시오.' 같은 무서운 문구와 함께 철이 있는지 몸을 수색하는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다시 무서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검색이 필수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생각의 전환은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를 보고 나서였다. 새벽부터 무서운 상상만 했던 도시였지만, 그 안은 환상을 상상하게 하였다. 

아야소피아를 먼저 보았는데, 빛들이 일렁이는 그곳을 둘러보았던 그때의 신비감을 잊을 수 없다. 모자이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감정도 그곳에서 처음 느꼈다. 숙소에 들어가지 못해서 이곳까지 드르륵드르륵 끌고 온 캐리어의 무게가 그때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2층의 전시물을 보기 위해 그것들을 들고 올라갈 때 그 무게가 다시 살아났지만.

블루모스크는 들어갔을 때, 이곳의 별칭이 왜 블루모스크인지 알게 되었다. 스테인드글라스와 불빛, 그것만으로 모든 설명이 되었다. 그들의 규칙을 위해 둘러주었던 파란 천까지. 이름을 완성시켜주는 공간이었다.


햇빛과 함께 초점을 말아먹은 아야소피아 내부 사진 (출처 : 개인 소장)


불빛과 스테인드글라스가 멋진 블루모스크 (출처 : 개인 소장)


종교가 없는 나에게 성당은 별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야소피아에 들어와 보니, 성당이 성스럽다는 느낌을 줄 수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다음에는 큰 성당이 있으면 한 번 정도는 들러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 안에 있음으로 얻을 수 있는 평안함이 있는 듯하다.


사실, 이스탄불의 신기한 느낌을 강력하게 주었던 먹거리 중 하나는 고등어케밥이었다. 그 비린 생선을 빵에 끼워먹는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친구에게 내가 이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하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고등어케밥은 내 머릿속에서는 괴식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쌓아둔 빵에 양배추를 척 올리고 그릴에 구운 생선을 올리고 레몬즙을 짜주는 것을. 일상에서 보던 샌드위치가 아니었다. 두려움을 안고 받아온 그것은 생각보다 평범해서 놀랐다. 탄수화물인 빵인 밥 역할을 해주었고, 밥에 고등어구이를 먹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였다. 걱정했던 사람답지 않게 나는 케밥을 잘 먹었고, 친구가 남긴 것까지 먹어치웠다. 나의 괴식 취향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반대편에서 야무지게 먹을 준비 중인 나 (출처 : 개인 소장)


이스탄불에서의 모든 경험은 이런 굴곡이 있었다. 전날 29리라까지 깎은 가방 가격이 다음 날 와보면 45리라가 되어 있었고, 유리창 안에서 손짓하여 들어간 식당은 사실 정리 중이어서 내가 앉을 곳의 의자를 내가 내려야 했다. 계속하여 홍합밥을 주었던 아저씨는 우리가 먹은 만큼 계산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알려주어 덤터기를 씌웠다. 카페라테와 초콜릿라테를 주문했지만 그 말을 못 알아들은 카페 점원은 이름이 뭔지도 모를 똑같은 음료 두 개를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그곳 사람들은 어느 순간은 친절해 보였고, 어느 순간은 나를 속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지켜온 공간은 신비했다. 아름답고 신비해서 그런 거짓말에 잠시 속아주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터키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때, 아저씨와의 장난 가격이 첨가된 느낌이었다.

 

이스탄불은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의 신비로움이 있는 도시고,  

석류 착즙 주스, 각종 케밥, 터키 커피 등 각양각색이 음식이 있는 도시다.


이스탄불 어느 분수 앞에서 (출처 : 개인 소장)


그리고 내게 이스탄불이란

아라비안나이트 속의 동화 같은 기분이 들어 그들의 귀여운 거짓말이 행복으로 느껴진 신비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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