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erKS Mar 17. 2020

세 번의 경주행

마음 산책 도시 경주


여행을 좋아하지만 자주 다니지는 못한 탓에 나는 재방문 여행을 꺼리는 편이다. 아직도 내게는 열어보지 않은 여행지 상자가 99+ 정도 있는 기분이어서, 이미 열어본 상자에 다시 고개를 기울이는 걸 썩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예외인 여행지가 몇 군데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가 경주다.


경주에는 세 번 오고 갔다. 내일로 여행을 하면서 한 번, 유럽여행을 다녀온 직후 두 번, 직장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친구와 함께 세 번.


아, 초등학교 수학여행까지 포함하면 네 번이 되겠다.


오래지 않은 기간에 자주 방문한 편이지만, 경주는 갈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야 말할 것도 없이 지루한 곳으로만 느껴졌고, 성인이 되어 처음 방문한 경주는 고즈넉한 美가 있어 예쁜 도시로 느껴졌다. 그다음부터는 마음이 복잡해질 때 경주를 찾았다. 경주에도 물론 높은 건물들이 있겠지만, 여행객으로 방문한 경주의 높이는 고분의 능선 정도였다. 그 완만함에서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곤 했다.






내일로 여행을 하며 들른 경주에서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동궁 월지(안압지)를 보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러 갈 때는 오랜만에 등산을 하는 기분이었다. 겨울의 끝물이어서 작은 눈송이도 우리를 반겼다. 등산만 반겨도 괜찮을 일정이었건만 눈까지 마주하는 바람에 몸은 춥고 고단했다. 그런데 그 고단함을 이길 감정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질퍽질퍽해진 땅도 산의 높이도 괜찮게 느껴졌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지만 성스러운 유적지를 보고 난 후의 개운함 같은 감정이 들었다. 그것을 느낀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마음과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이곳이 생각나는 것 보면 그 영험한 감정이 좋았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산책로를 내내 걷는 기분이 들었다. 1년을 모은 돈으로 떠난 유럽 여행, 그 후엔 40만 원의 잔고와 실직자라는 상태만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유럽에서 돌아왔다는 들뜬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딘가에서 마음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고, 행선지는 경주가 되었다. 서울에서와 달리 대전에서 경주는 가까웠다. KTX를 타고 두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그곳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침맞게 입고 간 초록색 바람맞이는 비를 맞아 풍기는 풀냄새에 더욱 쉽게 젖어들게 하였다. 천마총을 둘러싼 낮은 벽을 타고 걷는 시간은 번잡한 마음속으로 산책을 선물해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마총 옆 담장을 따라 걸으며 (출처 개인 소장)


사실 이때의 여행은 퇴사 여행 정리 편이다. 퇴사 여행의 종료 시점은 경주에서 대전으로 돌아오는 시점이 될 것이다. 유럽여행에서 담아온 자신감과 만들어온 습관을 지속시키게 한 여행이었다. 여행과 일상의 경계에 있었던 1박 2일이었다.


노독(路毒)이라는 말처럼, 여행을 끝냈을 때 느끼는 피로감이 있다. 여행이 즐거웠을수록 여행이 끝났을 때 느끼게 되는 피로감 또한 크다. 환상 같았던 시기를 지나 현실로 진입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퇴사 직후 떠난 여행이 그러했고, 상실감도 있었다. 그 상실감을 경주 산책으로 조금씩 잊어갔다.


반짝반짝 첨성대 (출처 개인 소장)


같은 세대를 지낸 이들에게 수학여행의 풍경 한 장으로 남을 이 공간을 다시 보면서, 이 시간도 한 장의 추억이 되겠지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풍경이 나에게는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어서 위안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있던, 내가 지나왔던 추억들이 있는 도시를 걸으며 지금이 추억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곳이 여기여서 유난히 편하게 느끼는 것 같다.






보슬비를 맞으며 걸은 하루를 정리하며 게스트하우스로 들어갔다. 1인실이 있다는 소식에 예약한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타고난 길치의 능력 덕에 휴대전화는 지도 앱을 켜느라 한동안 열을 낸 상태라 방전된 상태였고, 그때는 입실하기에 조금 늦은 저녁이었다. 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는데 나는 내가 다시 유럽으로 온 줄 알았다. 외국인이 내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저... 아직 유럽에 있나요?


손짓 발짓을 해가며 내 상황을 설명했건만, 그녀에게선 청천벽력 같은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음, 호스트가 지금 집에 없는 것 같은데 어쩌지?"


저 말만 남기고 유유히 들어가는 외국인을 뒤로하고 내가 어쩌다 주인을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 보면 아주 크게 당황하고 호들갑과 부산을 떨었을 것 같다.


주인에게서 수건 한 장과 방 키를 얻었고, 오래 걸었던 만큼 내 몸 구석구석에 묻어있던 피곤을 털어내고 방에 잠시 누웠다. 막상 TV도 동행도 없는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심심해서 거실로 나왔더니 한 남자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호스트 분도 나와서 셋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남자분이 경주에 게스트하우스를 차릴 예정이어서 답사를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내가 말할 차례였다.


"오늘은 모두가 가볼 법한 경주의 여행지를 다녀왔어요. 신선한 여행지는 없을까요?"

"남산에 오르면 좋은데......"

"내일 경주를 떠날 거기도 하고, 등산은 좀...... 무리예요."

"음, 그럼 경주에서 바다를 보는 건 어때요?"


경주가 바닷가 근처였던가?






마지막 말에 생각난 의문은 이것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나는 당연히 경주가 내륙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인터넷에 쳐보니 지도의 꼬리가 바다와 붙어 있다. 혼자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혼자였지만 굉장히 머쓱했다. 그때는 깜짝 놀라며, 놀라는 나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주의 바다는 주상절리로 유명했다.

[참고] 주상절리 : 단면의 형태가 육각형 내지 다각형인 기둥 모양의 절리를 주상 절리라고 하는데, 화산암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다음 백과사전)

국사에 이어 과학 시간에 보던 것까지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그보다 꽤 긴 해안가를 걷는 내내 신비한 모양으로 쪼개어진 바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했다. 전날까지의 경주가 내게 늘 보여주던 FM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오늘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흐트러짐이 너무 매력적이라 다시 한 번 반해버렸다. 마치 남자 연예인들의 상반된 머리스타일을 보여주며 깐 머리와 덮은 머리를 두고 무엇이 더 어울리는지 고민하는 것과 같았다.


이 바다를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10년 지기의 멋짐을 훔쳐보고 온 기분이라 남몰래 설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나중에 다시 꺼내보리라 다짐했었다.






3년쯤이 흐른 후, 다시  마음의 산책이 필요한 시간이 찾아왔다. 사회의 초년생인 나는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끝낼 때마다 혼자 속앓이를 했었다. 그때도 그런 속앓이를 하던 때였고, 친구와 함께 주말에 여행을 떠나 그 불안감을 잊으려 했다. 그때 다시 경주가 생각났다.


혼자 갔을 때, 좋은 기억이 남았던 곳들을 다시 일정에 넣었다. 카페, 숙소, 여행지 모두에서 그랬다. 갔던 곳을 또 간다는 것이 앞에서 말했듯 나에게는 정말 큰 의미였다. 다행히 친구도 그곳들을 좋아해 주어서 혼자만의 위안으로 끝나지 않아서 좋았다.


재방문했던 한옥 카페 (출처 개인 사진)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나만 알고 있던 장소에 친구를 들여놓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내 머릿속의 문을 열어 친구를 맞이한 기분이었다. 그곳의 분위기는 인터넷에 몇 글자만 쳐도 나오지만, 내가 어떤 기분에서 이곳을 찾았고 어떤 기분을 얻고 돌아갔는지는 나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며 친구를 여기에 들여놓으며 나의 예전과 지금의 감정들도 소개했다. 어쩌면 무거웠을 이야기였지만 친구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줌으로, 그 경험 또한 좋은 추억으로 남음으로 그 공간은 여전히 내게 산책지와 같은 곳으로 남았다. 숙소에서도 친구는 내 힘든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봐주었다. 그래서 그곳은 다시 한 번 내 마음의 산책지가 되었다.

세 번째 경주행의 마지막 여행지 양동마을 (출처 개인 소장)


마지막 여행지까지 보고 나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 나는 연신 "월요일이 오는 게 무서워."라고 말했다. 마음의 산책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무서웠던 나는 여행의 끝나갈 무렵 초조해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서울역에서 죽을 먹여 보냈던 친구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단히 체했고 집에서 속을 게워냈다. 경주에 있는 내내 밥을 그렇게 잘 먹었건만 서울로 오니 체기가 밀어올라왔던 것이다. 그때의 내게 일상은 버겁고 산책은 산뜻했던 것 같고, 그 감정을 몸이 솔직히 표현한 것 같다.





경주는 천년의 역사가 깃든 도시이며,

나에게는 버거운 일상에 숨을 불어넣어준 산책지 같은 도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알쏭달쏭한 신비의 도시 이스탄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