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을 찾아준 쾰른의 단상
KSBier
2020년 3월, 현재 내 별명이다. 앞의 KS는 이름을 축약한 것이고, Bier는 가장 사랑하는 음료인 맥주를 독일어로 적어본 것이다. 작가 설명에 쓴 것처럼 나는 맥주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2년 전 독일 여행을 끝내고 기억나는 독일어는 '구텐 탁'이나 '구텐 모르겐'이 아니라 '비어(bier)'였다. 그 애정을 실어 내 이름까지 대신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궁금해지지 않겠는가. 별명이 맥주인 사람이 가장 맛있게 마셨던 맥주는 어느 도시의 것이었는지.
사실 제목에서 이름을 이미 밝히고 있지만, 내가 가장 맛있게 마셨던 맥주는 쾰른(Köln)에서의 한 잔이었다.
서울에 산다면, 한강에서 캔맥주를 마셔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강과 맥주는 궁합이 좋다. 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맥주로 식도를 타고 꿀떡꿀떡 잘 넘어가지 않는가. 독일에서 강맥(강을 보며 맥주 마시는 것을 내 맘대로 줄여봄) 하기 좋은 곳을 추천해달라면 나는 두말 않고 쾰른을 추천할 것이다.
쾰른은 아주 작은 도시였다. 박물관만 포기한다면, 하루에 도시 한 바퀴는 돌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쾰른 대성당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으로 호엔촐레른 다리(Hohenzollernbrücke)가 보인다. 다리 아래에는 라인강이 흐르는데, 기차가 귀 옆으로 지나는 그 다리를 건너면 쾰른 대성당을 보면서 쉴 수 있는 강변이 있다.
내가 쾰른에 도착했던 그날, 그곳에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맥주 부스가 있었다. 맥주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가 그곳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앞을 서성대던 나에게 맥주 가게 주인이 물었다.
"무얼 줄까요?"
그런데 메뉴가 모두 독일어였다. (사실 영어였을 수도 있다. 읽을 마음이 없었다.) 독일어를 읽을 수 없었던 나는 호탕하게 말했다.
"가장 맛있는 맥주요!"
어이없는 대답에 그는 잠시 껄껄 웃더니, 이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더니 캔맥주보다는 드래프트 맥주가 맛있을 것이라며 그것을 권했다.
"오케이. 원 드래프트 비-어."
그가 가리킨 손가락에 적힌 돈을 내미려는데, 그가 1유로를 더 달라고 했다. 그리고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이 맥주는 유리잔에 줄 거야. 1유로는 유리잔 값이지. 네가 만약 가져가면 1유로는 내 거, 네가 유리잔을 가져다주면 1유로는 다시 네 거. 오케이?"
"아, 오케이!"
맥주를 들고 나니 마땅히 앉을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강변으로 가서 맥주를 두고 뜨거운 해를 맞으며 맥주를 마셨다. 강 앞에 서서, 가까이 있을 때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던 쾰른 대성당을 보며 목을 축였다. 언제 시간이 나서 이런 분위기와 이런 갈증이 딱 맞아 내게 최고의 맥주를 주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캔맥주가 아닌, 드래프트 맥주를 유리잔에 따라서 강과 함께 마실 수 있는 경험은 쉽지 않다. 이날 느낌의 완성은 유리잔이다. 캔이나 플라스틱 잔에 맥주를 따라 마시면 절대 있을 수 없는 느낌. 유리잔에 맥주를 담음으로 맥주 가게 주인이 맥주를 위한다는 혼자만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맥주를 대하는 방식이구나!'라고 혼자 감탄했다.
매일 이 풍경 안에 사는 사람들에겐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을 테지만, 한낮에 강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신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 힘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자 혼자 강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으면, 분명 어떤 슬픈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나를 흘깃 쳐다볼 것이다. 게다가 낮에? 아마도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이날 나는 외국이라는 것과 여행자라는 신분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누렸다. 아마도 그 자유로운 기분이 이날의 맥주를 더 맛있게 기억하게 한 것 같다.
쾰른은 내게 갈증을 없애는 맥주 같은 도시로 기억된다. 그때도,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맥주의 맛 때문에 쾰른의 인상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전, 바로 전 문장을 쓸 때 느꼈다. 내가 이곳을 좋아했던 이유. 그건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아무 때나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공간'이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나이에 맞게 점잖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특히나 사회생활을 할 때는 더욱더. 내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취향 역시 남들에게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내 취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여행만 가면 한국에서는 사지 않는 작은 피규어와 장식들을 사오는 것을 보면 그렇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와도 같은데, 그곳에선 내가 원하는 걸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여행자라는 신분이 날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쾰른에서 취향 하나를 더 찾았는데, 그건 바로 레고였다.
이역만리에 와서 구경한 것이 레고였다. 아이들 놀잇감이라고, 이제는 할 일이 없다고만 생각했던 레고를 몇 번이고 구경하고 선물을 준다며 괜히 몇 개를 만지작거리다가 사 왔다. 거기에 더불어 이후에는 백화점만 가면 플레이모빌(독일의 레고 같은 장난감사)에 들어가서 구경했다. 그때마다 살까 말까를 고민하며 친오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좋으면 사는 거지. 왜 이렇게 고민을 해?"
내가 레고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좋아함을 인정하지 못했구나. 참 단순한 사실을 몰랐다. 지금은 내가 좋아함을 인정하지만 쉽게 사진 않는다. 알다시피 저것들이 장난감이지만 저렴하진 않다. 어른에게도 꽤 큰 결심이 필요한 가격이기 때문이다.
쾰른의 레고샵에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원하는 어른의 모습을 내려놓고 맘껏 좋아했다. 강에서 맥주 한 잔을 하던 나처럼. 그곳에 있던 나는 한국의 직장인이 아니라 여행객이었다. 여행객으로 지낼 때 행복한 나, 그 행복을 담뿍 느끼게 해 주었던 도시 쾰른.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을 머무른 곳이었지만 그때의 행복만큼은 일주일치를 충전했다. 다시 한번 간다면, 조금 더 그 행복을 누려보리라 다짐한다.
쾰른은 역에 도착하자마자 쾰른 대성당이 보이는 도시다.
나폴레옹 향수로 유명한 4711 향수 가게가 있는 가게고, 사랑의 다리로 불리는 호엔촐레른 다리가 있다.
그리고 어느 것보다 시원하게 당신의 갈증을 달래어줄 맥주가 있는 도시다.
그리고
내게 쾰른은
일상에서 누르고 있던 취향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도와준, 한 잔의 맥주 같은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