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을 묻어두고 온 강릉에 대하여
어쩌면 이렇게 꼬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이 꼬였고, 존경했던 팀장님을 실망시켰고, 탓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힘들었다. 하필 사건이 터진 게 금요일이었고, 주말이 눈앞으로 다가와 일을 하면서 잊을 수도 없었다. 한숨을 쉬며 지하철에 올랐고, 온갖 시름을 다 안고 누웠다. 몇 시간을 누워 있었지만 잠도 오지 않았고, 계속 나의 한심함만 탓했다. 그러다가 밤을 넘어 새벽이 되었고, 어차피 잠도 못 잘 거 동해 바다나 보러 가자는 결론을 냈다. (아마도 수면 부족으로 인한 충동 때문이지 않을까)
프리미엄 고속버스가 생겼지만 본가가 그리 멀지 않은 탓에 타볼 기회가 없었다. 이때 첫 프리미엄 고속버스를 타게 되었다. 강릉은 내 생각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표를 예매하고 버스로 들어서니, 좌석마다 커튼이 달려 있어 마치 작은 방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방 안의 간이침대에 누워 나는 세 시간 동안 깨지도 않고 푹 잤다.
버스에서 내려했던 생각은 딱 하나였다. '바다 보러 가자.'
아침 버스를 타고 갔던 차에, 밥 먹을 때도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것도 바다 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때 향했던 곳이 안목이었다.
2017, 2018년에 '밤도깨비*(JTBC)'라는 주말 예능이 방영되었다. 군산 이성당 같은 유명한 가게에서 첫 번째로 유명한 메뉴를 사 먹는 미션을 수행하는 예능이었는데, 제목처럼 잠시 왔다가 사라졌다. 그 찰나에 강릉에 왔다 간 걸 봤는데, 안목해변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 때문인지 기억나는 바다가 안목 해변밖에 없었다. 바로 커피를 뽑아 마시고 싶었으나 빈속으로 출발했기에, 일단 허기를 채울 때까지는 하염없이 바다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매주 핫한 장소와 상품, 먹거리를 '1등'으로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밤도깨비들의 여정을 담은 프로그램으로, 이수근, 정형돈, 박성광 이홍기, 종현(JR) 등이 출연했다(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추가 설명을 덧붙인다).
바다는 파랬다. 또 바다는 퍼렜다.
주머니에서 나온 종이를 꺼내 겨우 엉덩이만 붙이고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니,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 바다는 깊고 깊어서 나는 큰 도화지의 점 하나로 느껴졌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지럽던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어서 한동안 바다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니 살짝 추운 듯하여, 낚시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었다. 멀리서 보니 바다는 더 파랬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 고민도 없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 무섭게 느껴졌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늑했던 공간이 무섭게 느껴지다니…… 신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닷속이 무서워져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쁜 마음을 먹고 떠난 바다는 아니었지만, 백사장에서는 저 안은 편안하겠지 하는 우울한 마음을 가졌었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그곳은 파란 게 아니라 까매서 들어갈 엄두도 나지 않을 곳으로 보였다. 그래서 살아야지, 버텨야지 싶어졌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배가 고파졌다. 어느새 점심때가 된 것이다.
빈속을 걱정하며 커피는 마시지 않았지만 점심으로는 물회를 먹는 굉장히 아이러니한 선택을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속을 뜨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나 보다. 가을에 얼음까지 동동 띄운 물회 한 사발을 먹어치우고 커피를 뽑으러 갔다. 지금 보니…… 커피도 아이스였다. 그때는 추위를 모르는 여자였나 보다…….
고민을 바다에 묻어둔 후, 배까지 든든하게(또는 차갑게) 채워서 강릉 여행에 나섰다. 안목 해변의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테라로사 지점을 방문해서 커피를 한 잔 더 하고, 오죽헌 구경도 했다. 꽤 많은 것들을 보고 마셨음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바다와 자판기 커피'였다.
여행지의 기억이 선명한 이유 중 하나가 '그때 했던 생각과의 융합'이라고 생각한다. 고민이 사라진 후의 기억은 약해졌고, 고민과 함께했던 때의 곳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때는 도피 아닌 도피를 온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웃음이 나는 하루일 뿐이고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바다에 고민 버리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답답해지면, 강릉에 가고 싶어진다. 악몽 같았던 그날을 추억으로 바꿔준 그곳으로.
오늘의 악몽도 언젠가는 웃으며 말할 날이 오길 기다리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