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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Feb 27. 2022

작가의 나이테

박준 작가의 <계절 산문>을 읽고

<계절 산문>은 한 그루의 나무다. 거칠거칠한 겉껍질을 넘기면 연한 속껍질이 나온다. 그 안에는 열두 달 동안 켜켜이 쌓은 작가 박준의 나이테가 있다. 매달 작가가 경험하고 듣고 느낀 것들이 쌓여 한 그루의 나무로 자랐다. 책 뒤편에는 "서로에게 번화했으므로 시간은 우리를 웃자라게 했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통해 열두 달 동안 작가가 어떤 햇살, 비, 바람을 맞았을지 상상하게 되었다. 한 문장만으로 소화하기 쉬우면서도 생각을 깊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감성을 맛볼 수 있다. 

마케터 박대리님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띠지'에 관련된 이야기가 올라왔다. 꽤 많은 독자들이 띠지의 용도를 책갈피라고 했고, 많은 출판 관계자들이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계절 산문> 띠지에는 광고인가, 드립인가 고민하게 되는 말이 적혀 있다.


"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

내가 친구에게 하는 말장난 같았다. 그때마다 친구들은 "나한테 끼 부리지 마"라고 말한다. 이 말이 작가의 플러팅이었다면, 성공적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홀렸으니까. 박준 작가는 속된말로 '오그라드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한다. 그 지점이 박준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가 꺼내놓은 감정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은 말랑말랑해진다. 그리고 세상은 조금 더 오그라든다(좋은 말로는 '세상의 온기가 올라간다'고 한다).


이건 나에게 못할 짓이야

물론 너에게도 못할 짓이고


너에게 화가 났다고 해서

너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나도 보고 싶어

그런데 만나고 싶지는 않아


저는 아무래도 이 세 가지 말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독해>


한 연으로 구성된 문장들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작가 또한 '영영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종종 이 상황과 맞닥뜨린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다만 이 상황을 언급함으로 사람들은 이해는 하지 못해도 상황 자체를 부인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했다고 책망받을 때, 나와 같은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으니까.




<계절 산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꼭지는 '선물'이다.


저는 그 잉크가 좋았습니다.

선물을 받은 일도, 계절이 지나는 산중 같은 잉크의 색도 좋았지만

제가 더욱 기뻤던 것은 그것을 제게 준 이가 문방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좋아하는 이에게 좋아하는 것을 건네는 법이니까요.

-<선물 : 수경 선배에게> 중에서




생일 선물로 뭐가 받고 싶냐고 물어볼 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네가 좋은 걸로 사줘"라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나(또는 나의 취향)를 알고 싶었고, 그가 나를 생각할 시간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쁘디 바쁜 현대인에게 나를 생각할 시간을 내라는 건 꽤나 강압적인 일이란 걸 깨닫고 그만뒀다. 그럼에도 나는 만족했다. 내가 원하는 걸 콕 집어 말하면 욕구가 채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문단을 읽고 만족의 이유를 알았다. 범위를 좁혀 이야기한다 해도, 그들은 '나'를 생각하며 주문을 하고 포장을 할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나를 생각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가끔씩 뜻밖의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누군가의 취향을 선물 받을 때 참 기쁘다. 박준 작가가 잉크를 선물 받을 때 느낀 감정과 같다. 그가 나에게 취향을 공유할 만큼 아끼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몇 해 전, 인센스 스틱(향)을 받은 적이 있다. 집중력을 요할 때 쓴다는 그녀의 취향은 이제 내 일상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좋아하는 이의 취향이 일상에 스며드는 건 행복한 일이란 걸 그때 배웠다.

내게 책을 선물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편집자라는 직업 때문이었다. 몇 번 책을 사달라고 한 적도 있으나, 너무 부담스럽다고 거절한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책 선물은 더욱 기쁘다. 부담감을 감내하면서까지 선물을 고른 마음 때문이다. 처음 받았을 때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책이 최애가 되기도 했다. 내심 어려운 책들도 있어 고심한 적도 있다. 어떤 과정이든 선물한 책을 읽을 때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면서 읽기에, 평소보다 더 많은 것들을 읽어내는 듯하다. (자, 그러니 이 글을 보고 있는 지인들이 맘껏 책 취향을 공유해줬으면 좋겠다)


박준 작가라고 칭했지만, 그의 본업은 '시인'이다.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이가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박준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시집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계절 산문>도 무척 좋은 책이지만, 그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고 난 후 이 책으로 넘어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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