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을 읽고
오랜만에 책 선물을 받았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완벽한 날들>이었다. 청록색 표지의 책을 건네며 그녀는 나에게 “이 책이 제겐 조금 어렵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다소 어려운 선물, 어감이 신기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말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퇴사를 선언한 지 어언 보름. 여유는 생겼지만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퇴사하는 날까지, 하루에 8시간씩 회사일에 매여 있어야 하는 건 똑같았다. (물론 전보다 과업이 줄긴 했다) 한동안 업무로 채워졌던 저녁 시간과 주말을 누리는 것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변화였다. 해보지 못한 것, 해보고 싶은 것, 처음 하는 것을 하며 그 시간을 보내고 있다. 3월 3일, 어젯밤은 처음으로 독서모임으로 시간을 메웠다.
<완벽한 날들>을 선택한 건, 빨리 완독하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틈틈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있는데,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간 꽃이 필 것 같았다. 과학책보다는 가벼우리란 착각도 섞여 있었다.
시와 산문이 함께 묶인 <완벽한 날들>은 참 어려웠다. 몇 번이고 서문을 읽고, 메리 올리버가 하고자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새겨야만 했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왜 그녀가 이 책을 선물했는지 찾는 것으로 독서의 목표를 바꿨다.
문제는, 삶에서든 글쓰기에 있어서든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독한 날씨는 이야기의 완벽한 원천이다. 폭풍우 때 우리는 무언가 해야만 한다. 어디론가 가야만 하고, 거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기쁨을 느낀다. 역경, 심지어 비극도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스승이 된다.
_<완벽한 날들> 중에서
표제작 <완벽한 날들>의 한 구절에서 그 답을 찾았다. 어떤 인연인지, 우리는 서로 힘든 모습을 많이 봤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인생의 길목에서 만났다. 퇴사는 또다시 한 번 빗줄기였다. 손으로 비를 피해가며 애써 웃어 보이는 나에게 그녀는 ‘비의 의미’를 선물했다. 누군가는 너무 뻔한 말에 감동을 받는 내가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아침 드라마급 클리셰였던 듯싶었다.
만약 내가 <완벽한 날들>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선물한다면, 무엇이 이유가 될까 고민했다. 몇 번이고 책을 뒤척이며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개들이 나무라면, 평생 목줄에 묶여 얌전히 걸어 다니는 개들은 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개들은 인간의 소유물, 인생의 장식품밖에 안 된다. 그런 개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광대하고 고귀한 신비한 세계를 상기시켜주지 못한다. 우리를 더 상냥하거나 다정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목줄에 묶이지 않은 개들은 그걸 해줄 수 있다. 그런 개들은 우리에게만 헌신하는 게 아니라 젖은 밤이나 달, 수풀의 토끼 냄새, 질주하는 제 몸에도 몰두할 때 하나의 시가 된다.
_<개 이야기> 중에서
회사를 비롯한 집단생활을, 특히 상하관계에서 을로 존재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온순한 강아지가 될 때가 많다. 나도 그렇다. 아파트에서 소리를 내지 말라고 교육받은 강아지처럼 나는 꽤 온순했다.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은 점차 하지 않게 됐다. 있는 듯 없는 듯 회사를 다니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굴어”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단체생활에서 조금이라도 튀는 행동을 하면, 이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 사회에 부적응한 사람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그런 취급이 싫었다. 그렇게 말을 잃었고 색을 잃었다. 그래서 나는 나무 대신 의자가 된 것 같다. 이제는 가공품이 아닌 자연의 일환으로 살고 싶다. 다른 누군가도 나무처럼 숨 쉬며 살길 바란다.
책을 선물 받은 이유를 추론해봤다. 하지만 완벽히 책 내용을 이해하진 못했다.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이 모두 습득되진 않았다. 어젯밤 독서모임을 끝내고 돌아올 때, 나는 다시 이 책을 읽어봐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글을 적는 지금, 어려운 선물을 다시 열어볼 수 있을까 살짝 알쏭달쏭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