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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KS Apr 15. 2020

[독서 기록] 아지트 여행 기록

김병운의 <아무튼, 방콕>을 읽고 





방콕은 그의 아지트

아지트 ←[러시아어] agitpunkt

 1.   어떤 사람들이 자주 어울려 모이는 장소. 

 소년단이 하는 일은, 태극기를 제대로 그리는 일과 우리나라 역사 공부였다. 아지트는 우리 집 골방이었는데….   출처 <<최일남, 숙부는 늑대>>


2.  비합법 운동가나 조직적 범죄자의 은신처. ‘근거’, ‘근거지’, ‘소굴’로 순화. 

     그 장소는 사기범 일당이 아지트로 활용한 곳이다.        


 3.  사회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활동을 비밀리에 지도하는 본부. 원래는 공산당의 용어였으나 지금은 주로 노동 쟁의와 같은 급진적인 활동에서 쓴다. 

       전북 도당 사령부 아지트는 맞은편 사면에 있다는 얘기였다.        출처 <<이병주, 지리산>>


                                                                                                             -  출처 : 표준 국어 대사전             


<아무튼, 방콕>을 읽고 나서 저자 김병운에게 방콕이란 아지트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지트의 뜻을 찾아봤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의미 차이가 조금 있는 것 같다. 저 중에서 하나를 고른다면 당연히 1번이겠다. 저자 김병운은 여자친구와 방콕을 여러 차례 방문했음을 말했는데, 그 의미를 아지트로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아지트를 떠올린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 방콕이 언제 떠나도 편안하게 즐길 여행지라는 사실이었다. 미국 여행을 취소하고, 여행은 취소하고 싶지 않아 선택했다는 곳, 방콕. 그에게 방콕은 실패하지 않을 여행지인 셈이었다. 늘 실패하지 않는 곳, 그곳을 아지트라 부르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내겐 아지트 같은 여행지가 없다. 이왕이면 새로운 곳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인 중 한 명은 매번 실패하지 않을 여행지를 간다. 여러 번 다녀온 곳임에도 재미가 있고 편안한 게 좋다고 했다. 조금 더 젊을 때는 그런 게 이해되지 않았다. 몇 년 흐르진 않았지만, 마음상으로는 너무 지쳐버렸는지 지금은 지인과 저자의 여행 스타일이 이해된다. 그런데 이미 내가 다녀온 여행에는 많아야 두 번의 재선택이 있었을 뿐이라 내게 실패하지 않을 여행지를 고르라고 하면 많은 고민이 될 것 같다. 몇 년 후에는 이 질문에 대답할 만한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지트 도서로 선정된 이유

'아무튼 시리즈' 부수기를 하는 중이어서 요즘 많이 읽고 있는데, 이걸 고른 건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였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페스트가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어왔다. 그때 함께 책을 고르던 오빠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금 방콕 이야기도 잘 팔린대."

단순한 장난이었는지 사실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나도 요즘 사람들이 읽는다는 방콕 책 좀 하나 골라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리즈 중 방콕을 골랐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방(에) 콕' 생활을 하는 지금의 상황과 제목 <아무튼, 방콕>이 닮아서 웃기다는 아저씨다운 발상도 약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유머 감각이 아주 잘 늙어가고 있었다.


선정 이유로 또 하나 단순한 것이 있는데,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이다. 하늘색이라고 하기엔 미묘하게 파란빛이 조금 더 있는 듯한 저 색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지금 이사 온 집은 창이 넓지만, 앞의 건물이 가까워 하늘이 보이지 않고 옆집 벽돌 색깔이 보인다. 앞에 설치된 불투명 가림막 때문에 고개를 들어도 하늘이 집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하늘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색이었다. 가짜 하늘이지만 저것을 옆에 두는 것만으로 조금은 숨 쉴 틈이 생기겠다 싶었다.


단순한 이유들이 많지만, 책을 고르는 데 많은 이유를 두지 않으려고 한다. 열심히 이유를 두어 고르는 책과 가벼운 이유로 고르는 책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어서다. 어떤 책이든 좋아하려면 좋아하게 되고, 실망하려면 실망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고민하지 말고 '이거다!' 싶은 게 있으면 읽어야지란 마음을 갖고 책을 고르자 마음먹게 되었다. 



사진 하나 없는 여행기

'아무튼 시리즈'를 읽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사진이 없는 에세이집이라는 점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책들이, 적재적소이기에 사진을 넣는 책들이 훨씬 많지만, 가끔은 페이지를 채우기 위해 사진을 넣는 경우도 있다. 그런 페이지가 글을 뛰어넘는 분량을 차지하는 책들이 개중 있다. 그런데 '아무튼 시리즈'는 글로만 승부를 보겠다는 책 이란 생각이 든다. 빈 페이지를 두고, 서체의 꾸밈없이 글로만 가득하다. 


빼는 것, 최소한의 것들을 내보이는 것. 그것은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을 한다. 이 시리즈를 담당하는 작가들의 글에 대한 자신감, 그것이 세 출판사가 이런 양식을 통용할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궁금증이 있었다. 그래도 여행기인데 사진 한 장 없이 가능할까?


가능했다. <아무튼, 방콕>은 정말 사진 한 장 없는 여행기였다. 이미 이런 류의 책이 많이 나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사진 없이 여행기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글 실력만 있다면 사진 하나 없이 여행 욕구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글을 읽고 방콕을 상상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사진으로 먼저 보았으면, 일단 상상해볼 수 없다. 어떤 곳인지 시각적으로 인식되어버린다. 그런데 시각적 인지 없이 머릿속에 펼쳐보는 방콕은 실제 모습보다 조금 더 환상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다음에 여기를 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저자가 방콕의 좋은 점만 썼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야간 택시를 타고 숙소를 들어가는데 택시 기사가 조는 모습을 발견해서 안전벨트를 꼭 쥐고 갔다는 이야기, 한국인이 없는 외국의 수영장을 즐기고 싶은데 이미 한국인이 많아서 한국 같았다는 이야기는 부정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그럼에도 방콕 여행을 고민하게 하는 건 '그럼에도 자꾸 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라는 점이다. 자신이 불편한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다시 찾게 되는 데에는 그걸 뛰어넘는 이유도 있다는 것으로 읽혔다.


호텔이 저렴해서 호텔을 가기 위해 방콕을 오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이런 점일 수 있다. 한국에서부터 기다렸다는 닥터핏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이런 이유들을 보고 경험해보는 걸 즐긴다.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그 호기심을 자극해서 여행 욕구까지 자극된 것 같다. 그리고 글에 적힌 이유 말고 다른 게 있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확신해버렸다. 그걸 찾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방콕에 가봐야지 생각했다. 


마무리하면, <아무튼, 방콕>은 내게 굉장히 신기한 책이다. 저자의 여행 방식도 신기했고, 책의 구성 방식도 신기했다. 누군가에게 내 삶의 방식이 신기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했다. 그에게는 보통일 여행 방식이 내겐 너무 신선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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