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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Oct 02. 2024

 런던에서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어떤 사람들은 스쿠루지가 바뀐 것을 보고 비웃기도 했지만, 스쿠루지는 그들이 비웃게 내버려두고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처음에 비웃는 사람들이 없이 시작된 선생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스쿠루지가 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사람들은 장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덜 매력적인 모습으로 병폐를 끼치기보다는 웃느라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것이 낫겠다고 스쿠루지는 생각했다. 이제 스쿠루지 자신의 마음이 기뻐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스쿠루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

 Some people laughed to see the alteration in him, but he let them laugh, and little heeded them; for he was wise enough to know that nothing ever happened on this globe, for good, at which some people did not have their fill of laughter in the outset; and knowing that such as these would be blind anyway, he thought it quite as well that they should wrinkle up their eyes in grins, as have the malady in less attractive forms. His own heart laughed: and that was quite enough for him.


 입사 5년 차, 괜찮은 직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일하던 중 회사의 지원으로 석사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면서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고, 대학원 첫해 여름방학에 아이를 낳았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으로 가을학기를 마치고, 8개월 된 아이와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나는 학교에 갔고, 남편은 아이를 돌봤다. 그 와중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전 세계가 멈춰버렸다. 미국에서 원격수업을 듣게 된 나 또한 학교에 다니는 건지 육아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행복한 순간들도 많은 미국 생활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한 생활의 제약과 돌쟁이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일상의 고단함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있다.

(그 시절 고군분투한 이야기 : 미국물 한모금 마시고 온 엄마)

   

 석사학위를 따고 한국에 돌아와 둘째가 태어나고, 본격 육아휴직을 했다. 다시 회사에 돌아갔을 때는 첫째가 38개월, 둘째가 14개월이었다. 남편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났고, 양가 부모님은 멀리 계셔서 도와주실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 어린이집 하원을 전담해주시는 베이비 시터 이모님과 함께 본격 워킹맘의 세계에 진입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육아 환경과 승진의 압박 속에서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날이 늘어났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늘어만 갔다. 혼자 운전하며 퇴근하는 길에 이대로 가로등을 들이받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복직이라는 나의 선택으로 나를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이 힘들어졌다는 자책감과 회사와 집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좌절감이 가득 찬 시기였다.     


 이후 1년은 남편과 함께 육아하며 숨통이 트였다. 잘 나간다는 보직을 받아 그럴듯한 회사생활을 했다. 회사라는 경기장에서 트랙 위 선수가 되어 승진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달렸다. 그래서 남편이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영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 선뜻 기뻐할 수 없었다. 결승점이 코앞에 보이는데 트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까웠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찮았다. 승진을 앞두고 회사는 더욱 바빠져서 하루에 아이들을 1시간밖에 못 보는 날이 늘어났고, 그래도 승진을 위해 조금 더 한국에 남아있을 방법을 찾는 중에 친정 아빠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대학병원에서 수술받고 힘든 치료가 이어지면서 마지막 남은 나의 비빌 언덕까지 사라졌다.


 시작은 그랬다. 한국에서의 복잡한 상황들이 나를 영국으로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영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내 마음은 어떤가. 물어봐야 했다. 이 모든 복잡한 일상을 두고 떠나는 것이 후련한가? 승진을 포기하고 편찮으신 친정 아빠를 두고 돌아서는 발음이 무거운가? 승진을 앞두고 휴직을 결정한 나에게 책임감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 힘들게 버티고 포기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사람들의 말처럼 회사에 미련이 남는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한 달 동안 한국 집을 비우는 내내 내가 런던에 가는 이유와 의미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런던에서 사는 2년 동안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만 가득 찬 단순한 일상을 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 가지 상황에 등 떠밀리며 살아왔던 시간에서 벗어나 내가 채우는 밀도있는 하루하루를 살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그 방향이 무엇이든 나는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정신없이 떠났던 4년 전 나의 미국 유학보다 이번 영국 생활을 더 많이 준비했고, 마음가짐도 더욱 단단해졌음이 느껴진다. 앞으로의 2년이 기대되는 건 화려한 런던때문이 아니라 조금 더 단단해질 미래의 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1위의 도시, 복잡하고 복잡한 런던에서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이어진 얽히고설킨 지난 시간을 잘라내고 앞으로 2년을 좋아하는 일들로만 채워진 단순한 일상을 살아갈 예정이다. 다행히 나는 런던의 나이트 라이프를 즐길 체력이 되지 않는 30대 중반이고, 아이들이 어려서 유럽 전역을 여행할 수도 없는 처지 아닌가. 모든 상황이 나의 단순한 일상을 응원하고 있다. 그래,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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