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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Oct 10. 2024

런던에는 나만의 공간이 있을까

출국 전 짐 정리 이야기

여성이 소설을 쓸 수 있으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
                                                                         버지니아 울프 – 자기만의 방

A woman must have money and a room of her own if she is to write fiction.  
                                                                                       Virginia Woolf, A Room of One’s Own


 한국에서 나는 사무실엔 컴퓨터가 2대 있는 넓은 책상이 있었고, 집에도 어른 서재를 따로 만들었으며, 본가에서 독립한 이후 10년여간 함께 해온 꽤 비싼 값을 내고 산 의자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만의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공간은 점점 편하지 않은 곳이 되어갔다. 사무실의 내 책상은 말이 ‘내’ 책상이지 업무가 바뀌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공간이었다. 컴퓨터에 저장되는 모든 보고서와 자료는 ‘내’가 아닌 누구든 볼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이었으며, 내가 고민하고 분류해도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주면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그런 자리였다. 우리 집 서재는 처음 만들었던 의도와 달리 점점 남편의 짐이 쌓이고, 여기저기서 받아온 아이들의 전집이 쌓이면서 나만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공용 책 창고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앉아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집 구석구석 어디 하나 내 공간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주방과 팬트리는 맞벌이 부부라는 핑계로 살림에서 손을 놓으면서 점점 나의 공간이 아닌 우리 집 살림을 걱정하는 양가 부모님과 시터 이모님의 공간이 되었다. 내가 모르는 반찬이 냉장고에 들어있고,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조리도구가 한두 가지씩 서랍장을 채웠다. 뚜껑조차 열어본 적 없는 압력밥솥도 찬장에 2개나 들어있었다. 옷장과 신발장조차 나의 공간이 아니었다. 나이 40살이 되어가도록 자신의 취향과 스타일을 아직도 모르는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지만, 어지러운 취향과 고민이 옷장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교복 같은 출근복을 제외하고는 중구난방의 옷가지들과 신발들이 정신없이 쌓여있었다. 언제 꺼내 입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들이 옷장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 주위를 둘러싼 공간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던 그때, 런던으로의 이사는 나의 묵은 정리 욕구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런던에서 살 집은 유학생을 위한 가족 기숙사였다. 195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니 위치를 빼고는 크게 기대할 게 없어 보이는 집이었다. 한국에서는 신축 아파트에 입주해 살았던 터라 오래된 도심의 좁은 집은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유학생 신분이다 보니 비싼 해외 이사를 할 처지도 되지 않고, 양가 부모님 집은 이미 오래된 짐들로 가득 찬 상황이라 자의 반 타의 반 물건을 버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에 들고 탈 이민 가방 8개와 선편으로 보낼 택배 몇 상자에 네 가족의 짐을 모두 넣기로 한 것이다.


 맨 처음 뒤지기 시작한 곳은 책장이었다. 책 욕심이 많은 어른 둘에 엄마 아빠를 보고 배운 아이 둘의 책이 커다란 책장 4개에 가득 꽂혀 있었다. 아이들 전집은 종류별로 묶어 아는 지인과 당근에 열심히 내놓았다. 원체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읽고 아무 곳이나 꽂아 두는 집인지라 전집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빠진 권수를 확인해서 연령과 취향에 맞게 정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겁기는 왜 그리 무거운지 노끈에 책을 묶어 내놓다 보면 땀이 뻘뻘 흘렀다. 어른 책은 알라딘 중고 서점에 열심히 팔았다. 그나마 ‘총, 균, 쇠’ 같은 스테디셀러 교양서적이나 신간 서적은 값이 꽤 나갔지만, 1970년대 출판된 박경리의 ‘토지’ 전집은 선뜻 버릴 수도 팔 수도 없는 책들이었다. 사 놓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이나 한번 읽었지만, 다시 읽을 일 없는 책들을 골라 열심히 팔았다. 살 때는 쉬웠지만 파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책을 팔거나 버리면서 몇 번이고 생각했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인가? 이 책은 다시 읽을 만한 책인가? 이 책을 읽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더라? 새삼스러웠다. 그렇게 남겨진 몇 권의 책은 런던으로 가는 가방에 차곡차곡 담았다.

(20년 묵은 일기장을 정리한 이야기는 일기는 일기장에)


 책을 정리했다는 자신감을 얻고 옷장을 열었다. 난감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옷을 입고 다녔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회사에 가야 하니 출근할 때 입는 대충 정장은 몇 벌 있는데, 그 외에 입을 옷은 맨날 입던 청바지 하나인 것 같았다. 분명 옷장은 가득 차 있는데 내 옷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취향이 아닌, 어설프게 추천받거나 선물 받은 옷들은 모두 처분했다. 남겨진 몇 안 되는 옷을 최대한 활용해 보겠노라 다짐했지만, 멋쟁이가 될 자신은 옷을 정리하던 그때도 없었고, 여전히 옷장에 대한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살이 다 되어 내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 이제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고 어색하다. 내가 아닌 타인의 취향을 끌어안고 지금까지 살아 왔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오히려 선호와 취향이 반영되지 않고 오로지 필요와 기능성이 중요한 주방 집기류, 아이들의 옷은 정리하기 쉬웠다. 주방 집기는 기숙사에 기본적인 집기류가 있다고 해서 압력밥솥, 국그릇, 면기, 숟가락, 젓가락 등 한식 조리도구만 얼추 챙기고 정리했다. 아이들 옷은 크기가 큰지 작은지, 이번 계절이 지나면 입을 수 있는지 없는지만 생각하면 되는 문제였다. 생활용품을 쌓아둔 팬트리 창고도 제품의 유통기한만 생각해서 분류하느라 내적 갈등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회사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집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집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샴푸, 세제가 쏟아져 나왔고, 유통기한 지난 샘플 화장품과 이미 버린 물건의 제품 설명서가 한가득 나왔다. 내가 사는 집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모르고 끊임없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집을 정리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살 때는 좋아서, 신나서 샀던 물건들이 집을 정리하는 기간 내내 처분해야 하는 숙제가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의 필요와 취향이 명확했다면 나는 더 가볍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다 치워진 집을 보면서 처음 이사 오던 날이 생각났다. 장난감과 책이 사라진 거실을 보며 아이들은 “엄마, 집이 넓어서 좋아”라며 웃었고, 나는 내 발에 꼭 맞는 신발, 네 켤레를 골라 이민 가방에 넣었다. 슬리퍼 하나, 평소에 신을 운동화와 구두 하나, 달리기할 때 신을 운동화 하나가 전부였다.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소중한 추억은 소중히 정리하고, 잊어도 되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 왔다. 가볍게, 언제라도 짐을 싸서 떠날 수 있는 삶을 살기로 했다. 주위에 쌓여있는 짐을 치우니 내가 오롯이 앉을 작은 공간이 비로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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