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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Oct 23. 2024

삼시세끼, 영국 런던 편

타지 생활 경력자가 쓰는 밥해먹기 대작전

 전업주부가 자신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사노동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일터에서 효율적으로 일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하는 최근 시간 관리에 관한 자기계발서와 일맥상통한다. 전업주부의 일터는 집이요, 업무는 식사 준비, 청소, 빨래 등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런던 전업주부인 나는 아이들과 남편이 학교에 가는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8시간이란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 늘 고민하고 있다. 매일매일 집안일만 하다 하루를 보낼 수 없다는 굳은 결심으로 그동안 손 놓고 있던 살림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공부하기 시작했다.

월화수목금토일 도시락 인생

 특히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가사 노동이며, 런던의 높은 외식 물가로 노동력의 아웃소싱이 불가능한 영역이 바로 ‘밥’이다. 매일 주어진 과제는 네 가족의 아침, 나의 점심과 남편의 점심 도시락, 네 가족의 저녁이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매일매일 밥을 한다는 것은 냉장고의 재고를 관리하고, 재고 소진에 유리한 식단을 구성해서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하고, 설거지하는 과정을 매일 3회 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출국 전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1년 동안의 미국 유학시절 아이 이유식과 어른들 식사를 준비하다가 서러움에 엉엉 울어버린 날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준비 없이 밥 폭탄을 맞아 런던에서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서러운 미국의 삼시세끼는 삼시세끼, 미국 시골 편)


 그래서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내 손에 맞는 조리도구를 챙기는 것이었다.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이니 분명히 가장 저렴한 모델로 구비한 칼은 누군가가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었을 것이며, 미국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무딘 칼날로 재료를 손질하다가는 내 손이 남아나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시어머니께서 혼수로 사주신 쌍둥이 칼이 주방용품 중 첫 번째로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 다음으로는 압력밥솥이었다. 미국으로 이사 갈 때 1년밖에 살지 않으니 미니멀리즘으로 살다 오겠다며 빈 몸으로 털레털레 갔다가 미국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중고 압력밥솥을 샀던 기억이 났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시나) 혼수로 샀던 압력밥솥을 꾸깃꾸깃 수화물에 챙겼다. 다음으로는 카레, 닭국처럼 대량 생산해서 여러 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 때 필요한 대형 냄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 기숙사에는 한국인 성에 차는 큰 냄비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냄비까지 챙겨가자고 할 때 남편은 제발 이제 주방용품은 그만 챙기자며 하소연했지만 내 옷을 빼는 한이 있어도 꼭 들고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마지막은 알루미늄 뒤집개였다. 미국에 살 때도 모든 조리도구가 실리콘이나 플라스틱이어서 도무지 손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특히 뒤집개가 실리콘인 경우는 너무 뭉툭해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달걀말이를 하려다가 뭉툭한 뒤집개로 말기에 실패해서 스크램블 에그가 된 일이 다반사였고, 왠지 같은 달걀 요리인데도 달걀말이를 먹는 포근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꼭 달걀말이를 원 없이 해먹겠노라 다짐했다.


 음식 재료는 큰 욕심 내지 않고 챙겨가기로 했다. 영국의 느리고 답답한 행정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 세관에서 문제가 생길 만한 것들은 챙겨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현지 재료로도 대~충 한식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국 음식 재료에 큰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욕심껏 싸 온 것이 코인 육수였다. 멸치와 야채, 종류별로 골고루 양껏 담았다. 입국해서 보니 런던 시내의 한인마트는 내가 생각했던 미국의 광활한 H마트와 사뭇 달라 한국 음식 재료를 조금 더 가져올걸 그랬나 잠시 생각도 했지만, 현지 마트에서 적당히 조달하며 잘 살고 있다. 미국의 H마트는 광활하고 여유로운 대지에 기반해서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그때 우리 가족은 차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한식 재료를 채워넣는 것이 가능했다. 추석에는 신고 배가 들어오고, 할라피뇨 넣은 순대국도 파는 한인 마트를 상상했지만, 런던 도심에 위치한 한인 마트는 규모가 너무 작고 여행자를 위한 간편식 위주의 재료만 있었다. 런던 근교 한인타운에는 대규모 H마트가 있다고 하고, 온라인 주문을 하면 배송도 해준다고 하는데 현지 마트에서 그럭저럭 살다 보니 굳이 한인 마트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었다.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딸의 요청에 아시안 마트에서 구한 춘장 / 디저트도 집에서 해먹는 경지에 이르렀다.


 일주일에 한 번 도보 5분 거리의 현지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무리하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 먹는 편이다. 차도 없는 이곳에서 장을 보러 30분씩 도보로 가기에는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크게 내키지 않는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항상 구비하는 한식 음식 재료는 대파(Leek)과 마늘이다. 미국에 살 땐 현지 마트에서 대파를 살 수 없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현지 마트에도 대파가 있다. (중국 출신 인구가 많은 까닭인지 청경채(Pak Choi)도 항상 마트에 구비되어 있다.) 마늘은 역시나 껍질도 까지 않고 팔길래 껍질을 까고 다듬는 귀찮음을 극복하지 못 서양식 마늘 가루(Garlic Granules/Powder)를 사서 써봤는데 아주 편리하고 맛도 괜찮았다. 영국에서 가성비가 좋은 식재료는 역시나 그렇듯 감자이다. 아주 포슬포슬한 감자 4개가 85펜스에 판매된다. 우유, 치즈, 크림 같은 유제품도 정말 맛있고 저렴하다. 단백질은 유제품으로 채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다양한 유제품을 섭렵 중인데 염소 우유를 제외한 대부분이 맛있었다. 그 외의 식료품 물가는 크게 저렴한 것 같지 않다. 영국 소고기는 한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싸지만, 미국 코스트코에서 파는 고깃값을 생각하면 손이 조금 떨려 속 편하게 소고기 안심처럼 비싼 부위는 선뜻 사기 어렵다. 과일도 저렴한 느낌이 별로 없는데 이전에 살던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가 워낙 따뜻한 지역이라 지역 내 생산된 베리, 복숭아 등 과일값이 저렴했기에 그런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냉장고의 재고를 효과적으로 소진하기 위한 식단의 구성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악명높은 영국식 급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매일 저녁은 최대한 한식으로 차려주려고 노력 중이다. 왠지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살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매일의 식단은 크게 세  가지 반찬묶음으로 구성해서 일주일 식단을 한꺼번에 짠다. 첫 번째 카테고리는 질리도록 먹을 메인요리 카레, 짜장밥, 닭국 등이고, 두 번째는 밥반찬으로 먹을 불고기, 장조림, 찜닭, 돈까스, 저장 가능한 채소반찬으로 구성하고, 마지막으로는 바로 해 먹어야만 하는 파스타, 국수, 수제비를 따로 구분한다. 매일 먹을 밑반찬은 김치를 매번 사기 귀찮은 관계로 양배추, 비트, 양파 피클을 주기적으로 만들여 쟁여놓는다. 매주 일요일 저녁 대략의 식단을 짜고, 월요일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마트에 들러 일주일 치 장을 봐 바짝 요리를 해두면 금요일까지는 따로 요리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 6끼를 해결해야 하는 주말에는 중간중간 외출이 있을 경우 도시락을 싼다. 주로 일주일 먹고 남은 재료들을 냉털해서 볶음밥을 하거나, 주말 먹을 것을 조금씩 사두기도 한다. 초반의 적응 기간이 얼추 지나고 주말마다 약속이 잡히기 시작하면서는 손님맞이 음식을 대량으로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외식하지 않는 지금의 삶은 쉽지 않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매일 오가는 거리를 지나며 주린 배를 붙잡고 유명한 식당 간판이 반짝일 때면 가슴이 쓰리게 아플 때도 있다. 지치도록 놀고 들어온 주말 저녁에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면 진이 빠질 때도 있다. 남편이 일주일 내내 비슷비슷한 샌드위치를 들고 학교 가는 걸 볼 때도 우리 참 궁상맞게 산다 싶을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다. 하지만, 외식하지 않는다면 한국에서의 생활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매일매일 내가 무엇을 먹고사는지 유심히 관찰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낯설지만 스스로를 돌보는 느낌이 들어 뿌듯한 기분이다. 버리는 식재료 없이 냉장고를 비울 때의 희열은 더할 나위 없다. 말로는 ‘제로 웨이스트’라면서 쿠팡에서 마구잡이로 배달시킨 식재료들이 바쁜 일상에 버려지는 걸 볼 때마다 자괴감이 들었는데, 금요일 저녁 텅텅 비운 냉장고를 보고 있으면 이번 주도 열심히 살았구나! 스스로를 칭찬해 본다.


 우리 가족의 삼시세끼를 처음부터 끝까지 챙기는 일, 한국에서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는 해볼 수 없는 일이다. 이왕 이렇게 살기로 한 거 맛있고 즐겁게 매일을 살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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