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결국 사라진다

by 규란

벌써 2025년 2월이다.

2025년을 맞이하며, 매일 무언가를 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인스타그램의 짧은 글이든 뭐든 쓰겠다는 다짐은 새해 첫날부터 무너졌다.

하지만 나는 다짐을 잘 지키지 못하는 나를 좋아한다.

이번에도 계획을 지키지 못했다니, 제법 귀엽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는 너무했지만.

이십 대 후반이었나, 나는 왜 늘 이렇게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지 한탄하다가 이럴 바에는 이런 나를 좋아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계획은 늘 안 지킬 걸 알면서 하는 허상 같은 거다.

그래도 종종 브런치에 글을 남겨보기로 또 기약 없는 다짐을 한다.


밴쿠버에서 독서모임을 시작한 지도 벌써 3-4년은 된 것 같다.

올해 첫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었다.

새해 첫 책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추천한 거였는데, 다시 읽으면서도 '어우, 21세기에는 안 어울리는 인물이야'라고 생각했다.

계획을 안 지키는 자신을 사랑하는 내가 전쟁터에서도 자신을 다잡으려 노력한 황제의 기록을 읽다니, 이건 마치 오전 11시에도 침대에 파묻혀서 갓생 사는 사람들의 브이로그를 보며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 거 같다.

<명상록>에는 이렇게 늦게까지 침대에 파묻혀 있는 나를 채찍질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나는 인간으로서 일하기 위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하라. 그 때문에 내가 태어났고, 그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나온 일을 하려는데 아직도 불평을 한단 말인가? 아니면 나는 이불을 덮고 누워 몸이나 데우려고 만들어졌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즐거운걸." 그렇다면 너는 즐거움을 위하여 태어났단 말인가? 간단히 말해, 네가 태어난 것은 느끼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행동하기 위해서인가? 너는 작은 식물들이, 참새들이, 개미와 거미와 꿀벌들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우주를 구성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하거늘 너는 인간으로서 맡은 일을 거부하고 내 본성에 맞는 것을 향해 달려가지 않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휴식도 필요하답니다." 그야 물론이지. 그러나 휴식에도 자연은 한계를 정해놓았다. 먹고 마시는 데 한계를 정해놓듯이 말이다. 하지만 너는 그 한계를, 충분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한데 행동에서는 더이상 그렇지 못하고, 네 능력에도 못 미친다. _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도서출판 숲


이걸 읽으면서도 낄낄거리며, '선생님, 저는 즐거움을 위하여 태어난 몸이고 싶어요. 아, 물론 제가 한계를 넘어서고 있긴 하지만요, 5분만 더 이러고 있을게요.'라고 생각했다니... 정말 나는 답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쓰면서도, '이런 나, 조금 귀여운걸?'이라고 생각했다니 참...

어쨋든 이 <명상록>은 염세주의적인 사고들이 가득하다.

아우렐리우스는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짧기에 이 모든 것이 덧없고 곧 사라질 것이므로, 황제인 자신도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도 공동체를 위해 조금 더 열심히 사는 것이라며 자신을 채찍질한다.

삶의 허무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단히 노력하며 사는 나는 <명상록>을 읽을 때마다 아우렐리우스의 염세주의적인 사고에 물들지 않으려고 꽤나 애쓰며 거리를 둔다.


이 책이 다시 떠오른 건, 개브리얼 제빈의 <섬에 있는 서점>을 읽으면서다.

섬이라는 특수한 지형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갖게 되는 폐쇄성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책을 펴자마자 훅 빠져버렸다.

책, 서점이라는 소재의 소설에 환호했던 지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여기에 나오는 또 다른 책들을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의 '책사다리' 엑셀 폴더를 켜놓고, 책 속의 책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이런 소설의 경우, 주의해야 할 건 허구의 책과 실제의 책이 섞여 있기 때문에 잘 파악해야 검색하는 10초라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매일 뒹굴거리는 주제에 10초 쓴 걸로 아까워하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러다가 책의 초반에서 '다니엘 스틸'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역자 주가 있는 걸로 보아 실제 소설가였다.

처음 보는 작가였고, 역자 주에는 '부유한 최상층 집안의 갈등을 소재로 정형화된 대중소설을 쓰는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되어 있었다.

번역본은 없을 거 같았고, 있어도 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기계적으로 인터넷 서점에 작가 이름을 쳤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작가의 책은 무려 80권 가까이 번역 출간이 되었고 모두가 절판이었다.

예전만큼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책에 대한 마음은 놓지 못해서일까.

그걸 보며 명상록 속에 있던 스토아학파의 허무주의를 떠올렸다.

베스트셀러 작가조차도 얼마나 빨리 잊히는 세상인가.

그렇다면 작가들은 왜 책을 쓰는 걸까.

SNS에서 본 것처럼, 1000명에게 읽히는 것보다 한 명에게 1000번 읽히고 싶어서 쓰는 걸까.

(이 글을 보자마자 배부른 소리라고, 자기 책을 내주는 출판사 입장은 전혀 생각 못 하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걸 봐도 나도 모르게 그것이 언젠가 먼지가 되는 것을 상상하고야 말아서, 그걸 피하려고 일부러 즐거운 척하기 때문에,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와는 되도록 거리를 두고 산다.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책에서 만난 한 작가 때문에 또 다시 이 사실과 마주하고 말았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뭐라도 쓰고 싶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래, 역시 올해는 SNS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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