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밖으로 나가고 싶어 참을 수 없는 에너지로 쓰는 글
불 켜지 않은 작은 방에 콕 박혀 재택근무 중인 ESTJ 디자이너.
숨은 해커, 혹은 벙커 속 암살자가 된 기분으로 업무를 이어 나가는 나날입니다.
집 밖의 생활을 잠시 멈추고 집안에서 일하며 느꼈던 바를 수줍게 기록해 봅니다.
Step 1
디자인이야 어떻든 전자레인지를 하나 구매한다
정신 차리고 보니 집에서 일한 지 2주가 지났다. 그리고 불현듯, 아침 일찍부터 물을 끓여 햇반과 냉동 닭가슴살을 30여 분에 걸쳐 데쳐 먹는 생활에 팍 진절머리가 났다. (본가에서 가지고 왔던 내 작은 냄비는 뭐든 한 개밖에 끓이지 못하는 케파(Capability)를 가지고 있다) 끓는 물에 데기도 하고, 냄비에 닿은 비닐이 쪼그라들어 불안한 마음에 물이 끓는 내내 옆에서 지켜본 그 생활을 진득하게도 2주나 했다.
미니멀리스트라고 떵떵거리며 요리와 배달조차 하지 않으며 살아온 내게, 전자레인지가 없는 강제 집순이의 삶이 이제야 큰 불편함으로 다가온 것이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전자레인지가 없어~' 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던 과거의 내게 작별을 고한다. 더는 끓는 물을 이용한 슬로우 푸드가 아닌 진짜 반조리 식품으로서의 햇반을 먹고 싶으니까.
Step 2
새로운 타입의 분노를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짐 싸서 택시 타고 집으로 얼른 가세요!'
하필 테니스를 하고 출근한 날이었다. 우람한 테니스 가방과 더 우람한 아이맥을 쿨한 척 지고 집으로 부랴부랴 돌아갔다. 계단을 올라와 문을 열고 들어가 후다닥 방 구조를 바꾸고 세팅을 마치니 온몸의 힘이 좌악 빠졌다. 회사도 우리 직원들도, 준비되어있지 않은 채로 시작한 원격 근무는 이런저런 웃지 못할 해프닝을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어느 회사나 그렇겠지만, 외부에서 근무하더라도 해야 하는 업무에 큰 변동은 없다. 그래서 나 역시 원래대로라면 회사에서 받아서 뜯어보던 제품의 샘플들을 내 집으로 받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인형부터 내 몸집만 한 쿠션까지 퀵서비스를 하루에 열 번까지도 주고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은 예고도 없이 '퀵 대신 직접 왔는데 10분 내로 도착해요. 댁으로 올라갈까요?' 하고 묻는 업체분 전화에 너무나 당황스럽고 화가 난 적도 있다.
팍하고 쉽게 화를 낼 뻔했지만, 필수불가결한 상황에서 그 어느 쪽도 악의가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했다. 나만의 안전해야 하는 공간이 업무관계의 수많은 분께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은 씁쓸한 경험이지만... 이렇게 힘든 시기에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Step 3
'가만히 있기'에 좀 익숙해져 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집에서 일하는 경험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집에 있는 것을 굉장히 답답해하고, 항상 집 밖으로 나갈 궁리만 하던 일상에 작은 변화가 돌았다. '가만히 있는 생활'을 어려워하던 내게 어느 정도 강제성이 있는 상황은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는 듯하다.
일단 입사 후 나아진 적 없던 만성 불면증이 왠지 좋아졌다. 타이트한 계획에 맞추어 살아온 지난 몇 년간의 생활에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르고 집에만 머무르니. 몸처럼 마음도 조금 느려진 것일까? 또 더는 만나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으니 덜 수다스러워지며, 혼자 생각하는 시간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그리지 않던 그림도 일찍 일어나 슥슥 그리고, '이건 언제 한번 봐야지' 하고 내적 허언을 해오던 두툼한 책들도 자기 전 조금씩 읽어 본다.
+Plus
매시간 시간을 어떠한 활동이나 누군가를 만나는 일로 꾸역꾸역 채우지 않더라도 충분히 괜찮았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 속에서 나 또한 한 사람 몫을 다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하던 것들을 자제하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를 잘 보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