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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리어스 May 08. 2021

쉬어감에 대한 두려움

직업이 없는 나에게는 어떤 수식어가 붙게 되는 것일까


‘하아. 난 백수가 체질인데!’


내겐 언니 같은 존재였던 막내 이모. 내가 어릴 때 이런 말을 종종 하고는 했다. 잠이 많고 집에서 조용히 쉬는 것을 좋아하는 소위 '집순이' 이모를 보며 중학생쯤 되었던 나는 속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지금의  나이가 그때의 이모쯤 되었겠다-의외로 나는 사회생활이 주는 소속감과 그에 따르는 성취감이란 달콤함이 굉장히  사람으로 자라 있었다.



새벽 내내 준비하고 오픈, 이후 큰 성취를 가져다 주었던 젠틀맨 프로젝트, 2018



기록하는 것과 종알종알 이야기 풀어놓는 것 모두 좋아하는 내게 직장 생활을 하며 나오는 여러 가지 결과물들은 많은 것을 끄적거리고 또 공유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회사 일뿐만 아니라 내가 무언가에 기여할 수 있거나, 글을 쓸 수 있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면 가리지 않고 해오기도 했다.


준비하는 시간이 가끔은 힘들고 때로는 잠을 줄여야 하더라도 '작은 성취의 달콤함'을 잘 알고 있기에 거절하거나 멈추기는 쉽지 않다. 물론 직장 생활과 이런 저런 활동들이 오직 보람 하나만을 안겨다준 것은 아니며, 늘 모두를 만족시켜 드린 것도 아니겠지만. 나는 운 좋게도 늘 좋은 분들을 만나 웃으며 일할 수 있었으니 그 시간들은 대체로 행복했고, 열심히 그리고 쉼 없이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만을 갖게 했다.


월요병조차 없는 나.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아주 가끔은 조금 울적한 날이 찾아온다. 멍하니 테이블에 앉아 ‘돈을 버는 일로서의 직업과 일들은 잠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헉헉대며 잡생각은 하지 않고 달리는 느낌에 숨이 가빠 온다. 구체적인 계획 따위 차치하고 그저 새로운 도시에서, 다인종이 가득한 다른 나라에서, 혹은 산골짜기 맑은 물과 숲이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질리도록 쉬어보면 뭔가 달라질 것만 같으며, 새로운 삶의 다음 지평이 열릴 것만 같은 충동이 고개를 든다.



옆으로 앉는 휴식, 2020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생각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는 흔한 것일 테지. 그리고 나 역시 이제는 어엿한 어른 중 하나이므로, '눈앞에 닥친 회사일과 그 외의 일'과 '현실적인 상황들'에 의해 그런 생각거리들은 쉽게 중재되곤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놓지 못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나름대로 끌고 오고 있는 '남에게 보여지는 내 직업인으로서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기업에서 근무했던 디자이너로서의 시간들과 내가 성실히 쌓아오고 있는   활동들로 만들어진 누군가에게 보이는 ‘ 존재.   세계에서는 너무나 사소하겠지만 내게는 사실 사소하지 않다. 실체는 나라는 사람 한명일뿐이지만, 제삼자가 바라보기를 기대하는  모습은 때로 실체를 뛰어넘는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형태가 두려워 내가 직업을 놓아 버리는  순간, 남들에게 세팅되어 있기를 바라는 나의 모습이 쉬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나를 구성하는  부분이 사라져 버리는 두려움의  순간이다.




내가 놓지 못하는 것은 나름대로 끌고 오고 있는 '남에게 보여지는 내 직업인으로서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일해온 동료들의 모습을 남긴  퇴사 전 선물 , 2020



(슬픈 글을 쓰려고 한 것은 아닌데. 쉽게 쓰여지고 마는 이 글은 글의 중간쯤부터 나를 약간 슬프게 하고 있다)


나도 좋아하는 것이 있고, 취미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작지만 내 나름의 낭만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일’로 설명하는 내가 가장 나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단지 주변의 반응을 보고자, 그다음에 내가 나를 어떻게 느끼는지 확인하고자 일순간 모든 직업을 내려놓고 속세를 휭 하고 떠날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나보다 앞서 삶을 겪어낸 분들의 생각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젊을 때 고생하는 것’ ‘쉬지 않고 커리어를 쌓는 것’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조금은 고리타분한 군상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냥 생각해본다. 어쩌면 나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도 잘 쉴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떠남을 미루어 온 것은 내가 일을 좋아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저 두려워서일지도 모른다고. 모두 내려놓고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만 같은 직업인으로서의 '일'이 없는 내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오늘 같은 날 조금 궁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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