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와인이 궁금해졌다

가랑비 옷 젖듯 스며드는 배움의 즐거움

나도 모르게 뭔가를 좋아하게 되어버리는 경험에는 역사가 있다.

어릴 적 아버지를 통해 관심을 가진 것에는 대략 악기 연주와 미술, 팝송, 독서, 철학 등이 있었으니까. 홀로 여유로이 클래식 기타를 좡좡 치고 계시거나 무심하게 거실에서 낚싯대라던지 '서양미술 400년전' 홍보가 실린 신문처럼 뭔가를 만지작대고 계실 때면 어린 나는 괜히 궁금했는데, '너도 해볼래? 가볼래?' 하면 그제야 나도 새침하게 따라나섰다. 대대적으로 시작해보자고 하거나 배우자고 하면 괜한 거부감이 들 것이 인지상정이기에, 아버지는 그렇게 마녀가 빵조각을 떨어트리듯 '관심 가질 만큼만' 힌트를 흘렸던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보는 재미가 쏠쏠했을지…).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야 '그건 청개구리 기법이었다'며 과거를 시인하셨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나는 악기도 휘두르며 / 그림도 잘 그리는데다가 / 깊은 철학적 사유가 있는 그런 팔방미인이 되진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강산이 두 번쯤 바뀌어도 그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하더란 것을 최근 깨달았다.

최근 이런저런 와인을 홀짝홀짝 마셔보게 되는 기회가 많았다. 이전까지는 와인이라면 음식점의 하우스 와인이나 연말에 회사에서 따는 샴페인 정도였는데. 알고보니 세상엔 수많은 와인 종류와 생산지와 품종이 있었다. 그리고 학문과 같이 그 한 분야의 지식층도 마니아층도 몹시 깊은 듯했다. 여전히 나는 뭐가 뭔지 모르지만서도, 몰랐던 나의 와인 취향을 더듬더듬 찾아가며 새로운 한 잔을 마실 때마다 행복했다. 나도 모르게 취향(Taste)이 생기고, 레이블(Lable)을 들여다보며 어려운 단어들이 친근해지는 순간 '아이고. 이미 난 와인이 궁금해져버렸구나' 하고 느끼게 된 것이다.

잠실 보틀벙커에서 살짝 훑어보다가 한 권 선물받은 입문용 와인 서적 (쿨한 표지는 아니지만 몹시 재미있다) , 2022

나도 모르게 취향이 생기고 레이블 속 어려운 단어들이 친근해지는 순간 '아이고. 이미 난 와인이 궁금해져버렸구나' 하고 느끼게 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경험은 삶의 타임라인에 도장을 찍듯 몇몇의 강력한 순간으로 남는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야에 들어오지조차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라도 조금의 지식이나 스토리를 알게 되는 순간 '팡'하고 새로운 세계가 눈에 한 글자 한 글자 들어와 버린다. 아직 와인의 레이블을 보아도 까막눈에 가깝지만 아펠라시옹이니, 보르도니, 탄닌이니 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괜히 아는 단어들을 읊어보는 나날이다.

모쪼록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 대부분인 삶에서 내게 스며들어 더 배우고 싶고 더 알아가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반짝이는지. 아직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이 있구나. 하는 청량감에 문득 휩싸이곤 한다.

친구와 스키장에 챙겨 간 샴페인과 아귀 간, 과메기, 우니 그리고 휴대용 와인잔,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