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씨처럼

너라는 존재

by GZ

손가락보다 엷은 줄기 끝에서 구체의 하얀 우주가 하늘거린다. 공기보다 가벼운 씨가 바람에 부러질 듯, 빗물에 쓸려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민들레 씨가 만들어내는 구형 우주를 본다. 푸름도 붉음도 검음도 아닌 백색이 만들어낸 성김 속에서 여백을 읽는다. 포공은 조밀함이 아닌 빔(空)으로 유채색이 아닌 무채색으로 빨강을 더 붉게, 초록을 더 짙게 만들고 있다. 반 이상의 빈 곳으로 완벽함을 빚어내는 이 하얀 씨의 매달림을 무모한 도전이라 부르련다. 그 흩날림을 생을 향한 자맥질이라 칭하련다.

무질서하게 허공을 떠도는 민들레 씨에서 내 두드림을 본다. 폐업, 낙방, 낙선, 경력 단절, 취업 준비생. 떨어지고 구르고 부유(浮游)하고 잘리는 단어들 사이에 긴 기다림이 있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원하는 길이 열리리라는 그 믿음의 시작은 ‘갈매기의 꿈’이었다. 무시당하고 놀림당하면서도 높이 날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조나단 리빙스턴과의 만남이 인생을 이 험로로 끌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내 목표를 달성한 조나단. 눈에 보일 듯 그려지는 조나단의 날갯짓을 읽으며 생은 응당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도전에는 한계가 없었지만 움직이는 만큼 실패는 더해지고 어둠은 그만큼 깊어갔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막막함. 나는 그 속에 움을 트고 있었다. 삼 년을 끌어온 사업을 정리하고 칠 년을 채워온 꿈길을 버리자고 결심했던 날, 바다를 찾았다. 퍼런 물 앞에 퍼질러 앉아 일기장을 써나갔다. 꿈이니 뭐니 하는 것으로 더는 삶을 몰아치지 말자는 다짐을 굳건히 하러 나선 길이었는데. 눈물로 이지러진 종이 위에는 작가라는 두 자가 남았다. 글을 쓰는 사람.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망가진 마음에 유일하게 남겨진 그 두 자를 나는 결국 버리지 못했다. 움켜쥔 빈손에 펜을 쥐고 돌아왔다.

내 삶에서 시계를 지워버린 꿈길을 십 년이 넘게 걸어왔다. 이름 없는 삶.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지워지고 있으리라. 희망으로 달궈진 한 자 한 자가 손등에, 팔 위에,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바람에 날려 온 민들레 씨들이 포공의 원형을 잃고 거미줄 같은 실을 자아낸다. 뼛속까지 아려오는 실패의 기억이 벌겋게 달아오른 철사가 되어 나를 죄어온다. 하늘거리며 물 위에 내려앉고 있는 민들레 씨가 말을 건다. 살을 찢고 뼈를 파고드는 듯한 고통에도 펜에서 손을 놓지 않겠는가. 한 분야의 지망생을 직업 삼아 사는 오늘이 네가 꿈꾸던 미래인가. 네가 그린 미래는 아직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가.

물이 민들레 씨를 쓸어간다. 그 위로 아른거리는 노란 꽃을 본다. 성기고 허연 구체 속에 하얀 생이 있다. 그 작은 것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고 다시금 씨를 남긴다. 꽃대에 매달려 있던 그 힘을 바람에 내놓는 순간 씨는 또 다른 생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을 터. 민들레를 약으로도 먹는다는 고 했던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이 도전을 약으로 쓸 날도 있으리라. 하얀 씨의 비행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심어줄 수 있으리라. 손에 든 펜의 소리 없는 움직임이 하나의 몸짓이 되어, 남겨질 날도 있으리라. 그리하여 이 찬란한 실패가 성공의 기록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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