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라는 존재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누런 고름 위로 피가 흘러내린다. 미간이 찡그려진다. 샤워기를 등지고 서서 물에 상처를 내민다. 물세례가 세찼나 보다. 종기 터진 자리가 욱신욱신 아려온다. 피와 물, 고름이 섞인 정체 모를 액체가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그사이 샤워 호스가 쏟아낸 물안개가 주변을 뽀얗게 물들여온다. 나는 순식간에 욕실 안개에 둘러싸인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생각한다. 비밀의 여운이 이토록 짙고 무거운 것이었던가 하고. 떠나지 않는 목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리며 귀를 문지른다. 상념이 그날의 기억을 불러낸다. 몸살로 드러누울 정도로 큰 짐을 지워준 친구가 야속하다. 왜 하필 내게 그 이야기를 털어낸 건지. 나는 욕실에 앉아 바다를 거닌다.
안개 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백색 풍경에 잠겨 걷는 두 여인이 눈동자에 어린다. 목소리를 쓸고 갔다 쓸어오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잔잔한 바람과 물기를 머금은 공기. 심상치 않았던 안개가 그날 고백의 전조였을까. 문득 귀를 파고들었던 친구의 말이 파도 소리를 멀게 하고 농무(濃霧)를 불러왔다. 사연은 가슴을 짓눌러오는데 뿌연 공기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탄식을 막아섰다.
고문 같은 고백이었다. 당황하지 않은 척하리라며 속을 달랬지만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안개는 걷혀 가는데 시야는 더 흐려졌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다음에도 이 친구를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을까. 생각이 두서없이 밀려들었다. 비밀의 안개는 그만큼 더 농밀해졌다.
한숨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내려놓는 것만으로 가벼워질 수 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지난날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도 아니었다. 내 신념에 반하는 인생을 대면할 수 있는 최선이 침묵이었던 것뿐이었다. 나눠 짊어지기에는 지나치게 내밀하고 서글픈 사연은 몸살이 되어 나타났다. 비밀을 공유하는 게 이토록 힘들고 아린 일이었던가.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귀 안을 청소하고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바른다. 몸은 말끔한데 머리는 멍하다. 애꿎은 상처를 문지르며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안개를 떠올리고 공지영의 <도가니>에 나온 안개를 그린다. 소설 속 안개는 아마득하건만 현실 속 안개는 음습하고 질척거린다. 평생 지고 갈 수밖에 없다던 친구의 말이 안개가 되어 나를 감싸 안는다. 무심결에 뱉은 한숨이 고통으로 얼룩진 친구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온다.
감당하지 못할 비밀을 지니고 사는 게 어떨지 알기에는 아직 덜 영근 것일까. 곪아 터진 속을 내놓기까지 거쳐왔을 그녀의 길고 질긴 시간을 모르는 게 아닌데도 걱정보다 야속함이 앞선다. 입맛도 할 말도 잃고 며칠을 끙끙 앓아누워 있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마음 졸이며 살았을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비밀을 지니고 사는 것이 얼마나 버거울지 막연히 짐작만 해 보았을 뿐, 나는 그녀의 편에 서주지 않았다.
태연한 척 비밀을 지켜내는 게 마지막 자존심이 되어버린 친구의 등에서 나는 끝내 종기만큼의 무게도 덜어주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여 줄 수도 터진 상처를 도려내도록 몰아 댈 수도 없었다. 평생 비밀에 부쳐진다고 할지라도 누군가의 믿음을 져버렸다는 사실은 주홍글씨가 되어 가슴에 새겨질 것이다. 결국은 오롯이 친구가 홀로 감당해야 할 짐인 것이다.
신뢰를 배반한 비밀은 스스로를 멍들게 한다. 진실을 대면하기 위해 마주해야 하는 아픔을 뼈를 깎아내는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지워지지 않을 흉터에 담긴 불안과 예상할 수 없는 통증은 두려움이라는 말로는 감히 다 담아낼 수 없다. 그렇다 해도 그녀가 농을 빼내듯 묵은 비밀을 뿌리까지 다 뽑아내면 좋겠다. 그리하여 푹 팬 상처에서 새 살이 차오르면 좋겠다.
욱신거리는 등에 연고를 바른다. 따끔거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괜찮아질 것을 안다. 그녀가 하루빨리 농을 짜내고 숨겨둔 꿈을 이야기하며 설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