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
불단 위 낯선 사진을 본다. 또 한 사람이 세상과의 이별을 고했다. 평온했던 내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생사의 강을 건넌 시간이 되었으리라. 자연의 섭리 안에서는 삶도 죽음도 과정에 지나지 않을 터, 생의 끝은 언제나 그렇듯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 주어진 삶에 대한 감사를 지장경에 담아낸다. 먼길 가는 이를 위한 불경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지는 고요한 아침이다.
어깨를 움츠리며 대웅전에 들어선다. 방석을 깔고 세 방향을 둘러 절을 한다. 턱이 덜덜거리도록 시린 추위 속, 화엄경을 읽는다. 하루에 열 페이지라던 마음과 달리 혀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원어로 쓰여있어 소리 내는 일조차 만만치 않은 까닭이다. 입에 익지 않은 글에 적잖이 더듬거린다. 꼬박꼬박 십오 분씩이라던 다짐은 번번이 이십 분을 넘긴다. 한 권이나 제대로 읽을까 했는데 포개 올린 불경이 꽤 많다. 조금씩 꾸준히 들인 공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 모습을 보여주나 보다.
구비 해 둔 불경을 세 번씩 읽고 보니 백 일이 지나있다. 잎 진 나뭇가지 위에 눈이 내려앉더니 한파는 봄을 안겨주고 떠난다. 긴 동면 끝에 꽃비를 맞는다. 쏟아지는 햇빛이 참 고마운 계절이다. 햇살 한 줌에도 행복이 깃들 수 있음을 넉 달을 보내고서야 깨친다. 운명이 내려친 매 자국에는 그사이 새살이 돋아있다. 간질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로 세상이 무너진 듯 괴로워했던 어리석음을 마주한다. 어제는 전부 내 것이라 여겼다가 오늘은 절망을 끌어안으며 견딘 날들이 눈을 지나간다.
한길을 가는 데는 일희일비 역시 불온한 마음일 터.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허울을 벗어던진 나와의 만남은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독감과 고열로 쓰러질 것 같은데도 억척을 부려야만 비로소 나에게 이를 수 있었다. 백 일을 하루 같이 보내며 한 가지 일을 완수하는 데는 정성과 끈기, 한결같은 정신력이 필요함을 배웠다. 마음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오는 사소한 일에도 삶을 향한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깨우쳤다.
사람 따라 시간이 더 주어지고 덜 주어지기도 할까.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들의 하루는 값지고 내 일상 속 한 시간은 가치 없다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영정 앞에서는 실패도 성공도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남들 앞에 내보일 가시적인 이력이 없다 해서 지난 시간을 억울해한 마음을 경계해야겠다.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문장 한 줄에 밤잠을 설치고 모진 매질에도 번번이 글 앞에 종아리를 내민 밤을 초라하다 여기지 말아야겠다. 삶을 채우는 건 결국 화려한 이력이 아닌 무던한 하루하루인 것이다.
다시 절을 찾는다. 새롭게 백 일을 채워 나간다. 한 걸음쯤 더 나아가 있을 나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거르지 않고 한 일을 꾸준히 할 것, 결과에 조바심 내지 말 것, 주어진 시간에 감사할 것,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릴 것. 백일이 남긴 교훈을 가슴에 새긴다. 내일의 결실을 위해 과정을 제물 삼는 우를 범하지 않으리라. 성취에 시간을 담보 잡혀 오늘을 가벼이 여기는 어리석음도 경계하리라. 풀린 태엽이 하루를 만들고 백일이 되고 천일이 되듯이 이 순간에 충실하리라. 신념을 지키며 채운 일각 일각이 족적이 되어 남을 날을 그리며 펜을 쥔다. 손이 떨려온다.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