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너라는 존재

by GZ

가지(支)가 검다. 껍질 위에는 검버섯 같은 얼룩이 앉았다. 먼지와 매연으로 뒤덮인 거무튀튀한 표피는 둥치를 까맣게 뒤덮었다.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차와 줄기 끝에 걸린 전선과 몸통을 두른 조명. 도롯가 나무는 시꺼먼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 윤기 없는 가로수에서 떼어낼 수 없는 가면을 본다. 그 위에 지난날들을 투영해낸다.

이 년 동안 낯선 환경에 내던져졌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손에 익지 않은 일을 하고 예상치 못한 경험을 했다. 자극의 소용돌이에 무방비하게 먹히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견해 차이의 부대낌을 소거하고 감정의 소진을 줄이며 새 관계를 맺어갔다. 침묵하고 싶은데 말을 하고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입을 닫고 울고 싶은데 웃었다. 마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사람들은 사회생활이라고 했다.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의지와 무관한 행동을 하는 내가 낯설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모든 게 거치적거리고 부자연스러웠다.

거리를 걸으며 숨을 돌린다. 이 사소한 일이 특별하게 느껴질 정도로 삶이 궤도를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천천히 나뭇길을 걷는다. 생기 잃은 나무와 사회인의 탈을 쓴 이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사람이건 식물이건 뿌리를 내린 곳이 생의 터전이 될 터. 햇빛을 받고 바람을 붙들고 비를 얼마나 머금을지는 선택할 수 있으나 배기가스와 몸에 감기는 조명등과 정수리 위 전선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전권이 없다. 살아남으려면 쉼 없이 날아드는 먼지와 살을 파고드는 전깃줄과 뿌리를 누르는 돌덩이에 맞는 마스크를 써야 한다.

숨이 막힐 듯한 불편을 느끼면서도 왜 이 불쾌한 가면을 벗어던지지 못하는지.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건만 내 모습이 회색 가로수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나뭇가지를 올려다본다. 나로 우뚝 서고 싶은데, 본래의 나로 살고 싶은데 익명성을 담보로 한 가면 속 안온함이 손을 붙든다. 잎 진 나무에서 두려움을 본다. 이곳을 이탈하면 실패라는 또 하나의 주홍글씨가 새겨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탈의 밀착감을 더 견고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리스어로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는 정신분석학에서는 가면 쓴 인격을 뜻한다. 사회에 내던져진 이상 역할에 맞는 얼굴을 갖추어야 한다. 때로는 의지와 무관하게 때로는 자신의 선택으로,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역할극에 충실해야만 한다. 무의미하게 출퇴근을 반복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의무에 익숙해져야 하는 삶을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되는 이들이 그 길을 택할까.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할까. 화장을 지우고 싶다, 가면을 벗고 싶다, 민낯으로 세상을 대면하고 싶다는 마음 이면에 ‘다름’을 무서워하고 거부하는 내가 숨어 있었음을 본다.

소음과 조명, 퀴퀴한 공기를 벗어난 수목을 만나면 이 갑갑증이 덜어질까. 한적한 곳으로 발을 옮긴다. 해와 바람과 흙이 전부인 데서 찬바람 속에서 싹을 틔운 나무에 이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의 몸짓이 눈을 지나간다. 뿌리에서부터 올라온 생의 트임이 저마다의 껍질을 입어야 하는 것이 존재의 숙명이라는 말을 전해온다. 홀로 살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일 터.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삶을 여미는 일은 가면을 벗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페르소나 아래 본래의 내가 있음을,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가능성의 형태로 생동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의식을 깨워 나가는 것이 진정한 나를 마주하는 길일 것이다.

겨울 끝자락에 서서 봄을 기다린다. 생명이 깃든 모든 것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그 봄의 도래를 말이다. 올해는 또 어떤 페르소나가 덧씌워질지, 어떤 가면을 만들어내게 될지, 그로 인해 얼마나 가슴을 내려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페르소나를 감독과 배우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한다지 않던가. 있는 그대로의 페르소나를 받아들이고 그 또한 나라고 수긍하며 생이 완벽하지만은 않음을 받아들이련다. 거기에서부터 나와의 진짜 만남이 시작될 것이다.

가면을 경계로 상충하는 자아를 관조한다. 미리 불러온 봄의 온기를 쥐고 민들레 씨를 불 듯 입김을 뱉어본다. 허연 꽃잎이 흩날린다. 이른 봄이 민낯을 비춰 낸다. 주저앉아 울고 싶어 질 때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봄의 원기를 상기하리라. 새 계절을 기다리는 이 마음을 반추하리라. 가면 밑 속살의 간질거림을 곱씹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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