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온기
아비의 눈으로 본 지난날은 내게 가시였다. 뾰족하고 서슬 퍼런 그게 당신에게도 박히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신은 내 부모에게 서글픔이자 아픔이었기 때문이었다. 편치 않은 관계에 놓인 운명의 가해자이자 피해자. 내게 당신은 그랬다. 비워진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것뿐, 본능과 이기(利己)에 지독히 충실했던 것뿐, 악의 없는 생이었을 텐데. 나는 당신이 항상 따끔거렸다.
드문드문 귀에 담은 당신들의 옛 시간은 어린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아버지에게 주어진 결핍과 당신에게 더해진 부담이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불편하게 느껴져 홀로 노트를 채운 시간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생모를 잃고 낯선 이를 어머니로 맞은 아버지의 인생이 서럽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비어 있는데 채워졌다는 유령 같은 자리. 아버지 편에서 상황을 넘어다보기만 했지 당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한 번도 가늠해보지 않았다.
남겨진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비보를 듣는다.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통보를 받고서야, 그것을 응시하는 이들의 눈을 보고서야 내 아비의 어미가 아닌 생을 필사적으로 마주해온 가녀린 여인으로서의 당신을 마주한다. 굽은 등과 밋밋한 가슴, 마른 다리와 뭉툭한 손에 녹록하지 않았을 연화(年華)가 깃들어 있다. 친모와 계모로 산다는 것은 이(齒)로 밧줄을 물고 수레를 끄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터. 생존의 파란을 버텨낸 당신이 얼마가 될지 모를 마지막 시간을 대면하고 있다.
나날이 말라가는 몸을 본다. 멀리서 또 가까이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영영 안녕이라는 말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할 뿐, 나는 죽음을 한 걸음도 뒤로 물리지 못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별. 끝은 오늘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내가 소화할 수 없는 단어인가 보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 자리. 당신 두 손에 힘을 들어간다. 손바닥이 상을 밀어낸다. 몸이 위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양어깨가 주저앉는다. 뼈만 남은 몸 덩이를 가누려는 몸짓이 위태롭다. 근육이 남아 있지 않은 팔은 끝내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다. 다리도 허리도 어깨도 제멋대로인 게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홀로 서는 일이 이토록 버거운 일이었을까.
당신 겨드랑이에 팔을 넣는다. 끙차. 올라가던 엉덩이가 아래로 떨어진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식식거리는 날숨이 귀를 타고 들어온다. 맥없는 사지가 노을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다. 다시금 겨드랑이에 손을 낀다. 천천히 호흡을 같이하며 어깨를 들어 올린다. 내게 온전히 몸을 내맡긴 당신이 서러워 눈가가 촉촉해져 온다.
아득바득 버틴 인생이었겠지. 한숨 쉴 새조차 허락하지 않는 생이라는 대지에서 떠밀려 나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붙들고 있었을 생애였겠지. 인고의 시간이 가볍지만은 않았던 걸까. 뼈와 가죽뿐인 몸에서 철근의 묵직함을 느낀다. 죽음이 종잇장 같은 당신 몸에 무게와 의미를 더해주고 있나 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허공을 더듬어 나가는 팔 끝에 뽀얀 손이 주어진다. 그 앞에 등이 놓이고 맞은편에는 지팡이가 서 있다. 혈육과 인연이 낳은 귀한 씨앗들이 내린 튼튼한 뿌리가 흔들리는 당신을 붙들어주고 있다. 저물어가는 생이 활기를 찾기를 바라며. 두 다리가 하늘거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사는 날까지 살아보자며 웃어보자며 울창한 나무들이 당신을 부축하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