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거리

거리

by GZ

신문을 포개 만든 산이 지하철로 들어선다. 낡은 수레와 천장에 닿을 듯한 폐지와 너덜너덜한 밧줄. 휴대전화를 향해있던 고개가 입구로 방향을 튼다. 흘끔, 무심한 시선이 폐지 지나온다. 늘어질 대로 늘어진 끈과 떨어지려는 신문과 수레를 붙든 사내의 모습이 눈을 채워온다. 발가벗은 누군가를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황급히 눈꺼풀을 내려 감는다. 앞은 보이지 않는데 노인의 모습은 어쩐지 더 선명하다.

왜 하필 이 객차에 타서,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게 하는지. 한숨에 불편한 심사가 실린다. 명치를 치고 나온 숨이 가슴을 두드린다. 내려 깐 시선으로 승객들의 얼굴을 살핀다. 구겨진 미간과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와 옴지락거리는 입술이 지나간다. 제각각인 표정이 무정함의 표상으로 뭉뚱그려진다. 노인이 내려주기를, 그리하여 그가 그들의 시선을 침해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리라.

객차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기심을 물리고 차장 너머로 노인을 응시한다. 저어기 문 앞에 시간이 놓여 있다. 버려진 종이 산을 버팀목 삼아 선,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 통로를 막고 있다. 한 부의 신문은 한 번의 인생 고비일 터. 굽이굽이 삶의 질곡을 마주해온 노인이 생(生)의 더미가 되어 문을 지키고 섰다.

신문 한 부가 바닥에 떨어진다. 툭. 둔탁한 소리가 귀를 지나간다. 승객 한 명이 구겨진 종이 뭉치를 집어 든다. 노인이 거칠게 폐지를 낚아챈다. 여자의 볼이 붉어진다. 관객이 되어 그들을 보던 얼굴들에 그늘이 진다. 느슨해진 줄 사이로 신문이 흘러내린다. 지하철은 쉼 없이 내달리고 바퀴는 좌우로 흔들리고 주름진 손은 구겨진 종이 산을 채 다 붙들지 못한다. 툭, 툭, 툭. 재활용 종이로 뒤덮이는 바닥으로 여자가 팔을 뻗는다. 뒤이어 곁에 있던 청년이 폐지에 손을 뻗는다. 아이를 안고 선 어미도 손을 보탠다. 건드리지 말라는 노인의 말을 뒤로하고 승객 모두 종이 수호에 마음을 더한다.

노인을 향해 눈을 돌린다. 등이 활시위처럼 휘었다. 허리 굽은 노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로댕의 조각을 본다. 백년전쟁 당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영국에 목을 내놓겠다 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조각상, 칼레의 시민. 세기의 조각가로 불리는 로댕은 위험에 처한 시(市)를 위해 목숨을 헌사하려던 여섯 영웅을 늠름한 모습으로 빚어내지 않았다. 로댕의 손을 거쳐 나온 그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입을 다물고 목을 돌리고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외면하는, 더없이 인간적인 상으로 삶을 그리고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생은 걸리적거릴 것 없는 순탄한 무엇이 아니라 두려움과 허망함, 먹먹함과 분기를 품고 앞을 마주해나가는 지난 한 여정이다. 노인은 남루한 옷을 걸쳤고 나머지 승객은 깨끗한 옷을 입었다는 것만 다를 뿐, 삶이라는 거대한 산을 마주하며 오늘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인생은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이라던 시인 영랑(永郞)의 말처럼 아득바득 시간을 마주해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날 선 몸짓으로 밧줄을 당기는 노인을 본다. 자코메티의 조각 같은 몸을 뒤덮은 헝겊에서 먼지가 날린다. 엷은 입김에 쉬이 날려버릴 그 가벼움이 어쩌면 그를 지탱해 온 생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여리다 할지라도 그 미약함을 붙들고 세월을 지켜내 온 힘은 결코 약하지 않을 터. 당신에게 폐지는 생의 전부가 된 무엇이다. 버려졌다는 것을 이유로 그 누가 그것을 쓸모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지. 어느 누가 한 겹 한 겹 쌓아온 당신의 시간을 영락하다 할 수 있을지.

지하철이 선다. 노인은 여전히 줄과 씨름하고 있다. 바퀴 소리는 멎었으나 하차하는 사람은 없다. 노옹을 응시한다. 굽은 등과 틀어진 손가락, 갈라진 얼굴 안에 넘어다볼 수 있지만 내려다볼 수 없는 굳건함이 있다. 소리 없는 몸짓이 무언의 말을 건네 온다. 앞질러 갈 수도, 역행할 수도 없는 것이 시간이라고.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라던 시인의 글귀를 속으로 곱씹는다.


Monument des Bourgeois de Calais.jpg 칼레의 시민_출처 http://www.musee-rodin.fr/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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