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리구시

거리

by GZ

칼바람이 그릇을 지나온다.

빈 나무에 담겨 있는 건 쌀이 아닌 바람이다. 흰밥 소복한 그릇이 눈에 아른거린다. 숟가락을 들고 배처럼 생긴 나무를 둘러앉은 사람들. 박꽃 같은 웃음이 어린 얼굴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밥 한 숟갈이면 임금도 부럽지 않다는 듯한 외침이 들리는 것도 하다.

거대한 나무 그릇을 쓸어온 바람이 볼을 매만진다. 환영을 걷어내며 안내문으로 시선을 옮긴다. 싸리나무 껍질로 만든 그릇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송광사 승보전 옆의 뿌리 없는 이 느티나무는 큰제사 후 백성들에게 줄 밥을 넣어두는 통으로 사용되었다. 사천 인분의 일곱 가마니 쌀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그릇이다.

1724년 절에 온 후 몇 년이나 그릇으로 쓰였을까. 마르고 틀어진 모서리로 짐작하건대 밥그릇보다는 전시물로 더 긴 세월을 보낸 것 같다. 밥풀이라도 한 톨 남아있으면 아쉬움이 덜 하련만 유물 같은 고목에 물기는 없다. 마른나무는 그릇으로의 기능을 잃고 죽은 나무가 되어 있다.

뒤틀린 비사리구시에서 배고프다 울먹이는 이들의 아우성을 듣는다. 국민을 잘 먹여야 할 국가가 빈 그릇을 내놓았던 때가 있었다. 아이엠에프였다. 국고가 비고 나라가 빚더미에 앉았다는 소식에 서민들은 금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돌 반지, 금괴, 금가락지, 금목걸이. 그들은 사연이 담긴 금을 내놓으며 조금이나마 나라에 힘이 되어주고자 했다.

똘똘 뭉친 애국심이 컸던 걸까. 허리 졸라매기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숨쉬기가 수월해졌다. 이후 밥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호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다. 소득이 늘고 수출이익이 증가하고 새 건물이 올라갔다. 호황이 계속될 줄만 알았다. 풍파를 헤쳐 온 만큼 다시 배곯을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그릇이 넘치도록 밥이 담기는 일이 잦아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밥그릇에 금이 갔다. 소비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고가 여행이 늘고 사치품 구매가 증가하고 호화스러운 간판이 판을 쳤다. 그러더니 어느 날 문득 그릇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맞은 경제난에 사람들은 서로를 탓하기에 바빴다. 더 가지기 위한 축재와 비리, 투기가 수면 위로 드러났는데도 고개를 숙이는 자는 없었다. 자기 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을 뿐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이들은 살피는 눈은 없었다. 고성이 난무한 가운데 망가진 밥그릇은 고쳐질 기미도 채워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땟거리를 잃은 서민들은 비사리구시를 지통(紙桶) 삼아 종이를 만들었다. 그들은 손이 부르트도록 통을 저으며 종이가 쌀이 되어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주린 배를 쥐고 종이를 만들며 살기 좋은 시대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2014년 봄, 뒤집힌 배를 보고서야 국민들은 바닥이 없는 비사리구시를 마주했다.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도 속수무책이었던 정부. 밥통을 지통(紙桶)으로 내준 마음을 생이별의 허망함으로 돌려받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정과 비리 속에 누군지 모를 관계자를 찾는 쇼만 있었을 뿐, 수긍할 수 있는 해명은 없었다.

숟가락이 허공에서 춤을 춘다. 밥을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듯 이제는 밥그릇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돈으로 상실을 무마하려는 수작이 좋은 나라에 대한 실낱같은 꿈을 앗아가려 한다. 배고픔은 몸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이 상식이 되어가는 시대, 우리는 정신의 허기에 시달리고 있다. 청년은 구직에 허덕이고 장년은 배신감에 잠겨있고 노년은 상실감을 한탄하고. 언제 제대로 된 밥을 먹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어디선가 조작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는 불신. 믿음에 굶주린 사람들이 축재와 부정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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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추웠던 2015년 겨울, 가슴속 응어리가 무거워 다시 절을 찾는다. 절에서 바닥이 뚫린 비사리구시를 만난다. 낯 모를 이들의 수많은 눈이, 비사리구시의 사라진 바닥을 지나간다. 종이 만드는 통으로 쓰이기도 했다는 비사리구시. 따뜻한 밥 한 끼와 살기 좋은 나라에 대한 꿈은 놓지 못하겠다는 듯 밥통을 뒤집어 바닥을 덧대고 있는 사람들이 눈을 채워온다. 내 아이들은 마음의 굶주림을 모르고 자랐으면 하는 바람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손에 코끝이 찡해져 온다.

비사리구시 구멍 밑으로 겨울바람이 뱀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마른 그릇 위로 보이지 않는 땀과 눈물이 떨어진다. 진실에 허기지고 정의에 목마른 이들의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묵묵한 인내의 시간이 빛을 발할 날이 오기를, 얼른 황량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가녀린 꽃잎이라도 날려 스산한 그릇 안을 메울 수 있기를 마음을 다해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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