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저어기 멀리 점멸을 반복하는 무엇. 걸음을 멈춘다. 깜빡깜빡. 등댓불처럼 환해졌다가 어두워졌다가. 몸을 돌려세운다. 공기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시간을 머금고 서서 그 깜빡임에서 의미를 읽어내려 한다. 이렇게 멎어있음은 속 터 둘 데를 잃은 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려서인지 모른다.
발을 옮긴다. 조명에 눈이 아련해진다. 골목길 모퉁이에 새 카페가 자리 잡았다. 불을 켜둔 것뿐인데 온 동네가 훤하다. 통유리를 벽 삼아 빛을 뿜어내는 공간은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다. 유리창이 내보내는 밝음이 어둠을 별로 만든다. 손잡이를 민다.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찰랑찰랑. 조명이 발끝을 간질인다. 몰캉한 공기가 볼을 매만진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앉는다. 수첩을 펴며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옷, 열쇠, 비행기 표, 인형, 일기장, 펜. 잃고 채워놓기를 반복하며 걸어온 지난날이 보인다. 그 속에 매몰된 한 아이를 본다. 꾹 닫은 입 위로 자리 잡은 둥근 눈. 아이가 소리 없이 말을 건네 온다. 너를 잃지는 않았는가. 온전한 너로 존재해 왔는가. 그 말을 듣는데 목이 메는 이유는 뭔지, 빛은 번져나가는데 입은 굳어 있는 이유는 뭔지.
혀 대신 손을 움직인다. 까만 눈이 노트를 채워온다. 검은자위에 조명이 겹쳐진다. 노랗고 검은 무엇이 종이 위에 구멍을 낸다. 툭툭. 어두운 구멍이 빗물이 되어 떨어진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방울의 파문. 그 가운데 서서 손에 쥐었던 것과 떠나보낸 것을 곱씹는다. 태풍이 불어닥쳤다가 물러났다가. 앞이 뽀얗다. 바람에 휘둘리는 사이 시야도 좁아진 모양이다. 검은색으로 도배된 종이를 보고서야 깨우친다.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실은 없었다는 사실을. 손은 애초부터 채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열 시, 폐점시간이다. 테이블이 치워지고 손님들이 나가고 조명이 꺼지려 한다. 문 앞에 선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 했던가. 평온의 가장자리에서 밖을 넘어다본다. 저 너머는 폭우가 내리고 있을지도, 아니면 폭염에 불타오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 빛과 어둠 가운데 자리 잡은 적요와 침묵을 머금는다. 그 여운을 가슴에 새긴다.
심호흡과 함께 문을 연다. 차 소리가 귀를 치고 들어온다. 먹먹하다. 고요함과 소란함 가운데 서서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잃은 것이 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로 인해 무게를 소거 당한 채 떠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소용돌이치던 소리의 움직임이 잔잔해진다. 길 잃은 발은 방향을 잡았고 구름에 가린 달은 고개를 내밀었다.
뒤를 돌아본다. 거짓처럼 빛이 사라져 있다. 어둠에 잠긴 가게가 말한다. 빛의 점멸은 내가 내게 보내온 시선이었다고. 나조차 까마득히 잊고 있던 내가 나에게 건넨 마음의 눈이었다고. 쉬어가도 된다는, 숨 돌려도 된다는, 실수해도 된다는 다정한 손길이었다고.
무심함 혹은 무감각함으로 인해 소실해 버린 것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눈의 소실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삶에 매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애도의 인사를 건넨다. 잃은 공간을 매만진다. 빛이 든다. 눈이라는 생(生)이 애상한 눈길로 나를 비춰 낸다. 물끄러미 나의 소실을 바라봐 주고 있던 눈동자를 이제야 마주한다. 검고 하얀 동그라미에 투명한 반짝임이 밴다. 언젠가 귀하게 사용할 찬란함의 씨가 시신경을 채워온다.
빛, 그것은 눈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눈은 생명의 동의어였다. 오늘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만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 터. 그 중심에 따뜻한 시선을 놓아둔다. 어딘가에서 나를 그리고 당신을 지켜봐 주고 있을 은은한 시선의 온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