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와 부채

by GZ

한옥에 앉아 마당을 응시한다. 지열이 일렁인다.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형체를 드러낸다. 멍하니 땅을 쳐다본다. 모래 위로 열이 피어오른다. 네모 각진 마당은 누런 흙과 투명한 그늘, 붉은 앵두와 둥근 기와를 한 점의 그림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대청마루 계단에 앉아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운동화를 바닥에 내려둔다. 붉지도 검지도 않은 발자국이 낙관이 되어 놓였다.

숨을 뱉는다. 공기가 밖으로 밀려났다가 속으로 들어왔다가. 잔잔한 물결이 일어나듯 허공에 파문이 인다. 처얼썩처얼썩. 둥근 처마에 닿은 숨이 투명한 파도를 만들어낸다. 파도를 타고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것이 공기인지 나인지. 접혔다가 펼쳐졌다가. 꺾인 처마에서 합죽선을 읽어낸다. 처마의 접힘과 부채 선목의 겹침. 그 닿음에서 계절을 가늠할 수 없는 바람을 맞는다. 눈 아래로 쏴아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나가고 다시금 가까워졌다가 이내 또 멀어지고. 눈이 시큰해져 오는 이유는 바람 때문인지 더위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파도 때문인지.

하늘을 올려다본다. 정수리 위로 네모 반듯한 하늘이 스케치북이 되어 놓여 있다. 그 사이로 제비가 부산스럽게 날갯짓을 하며 투명한 선을 남기고 간다. 날갯짓을 따라 획을 더하고 빼기를 거듭한다. 창이 나고 문이 생기고 문고리가 더해지고. 보이지 않는 창살 뒤로 제비는 쉼 없이 무엇인가를 남기고 새기는데 나는 어째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다.

하늘색 스케치북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구름. 금방이라도 흘러내려 버릴 것 같은 푸르름이 지붕에 있다. 방울져 있다가 엷은 기침 한 번에 툭 떨어져 내려 버리고 말 것 같은 푸르름이 하늘에 서려 있다. 더운 여름을 시리게 만드는 눈물이 처마에 걸려있다. 위로 올려 둔 시선을 거두며 눈을 감아내 린다. 눈꺼풀 아래로 따뜻함이 번진다. 삼켜 둔 시림이 우두둑 떨어져 내린다.

각진 처마가 시야를 잠식한다. 처마와 기둥을 꺾어 만든 네모 반듯한 마당과 그 위에 놓인 두 다리. 발 사이에 제비가 물어놓고 간 박 씨가 질문이 되어 떨어진다. 의지를 꺾어 본 적이 있었던가? 고개를 젓는다. 꺾여본 적은 있지만 꺾어본 적은 없다.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하는데, 접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는 나아가는 것만 알았지 내려놓는 법은 몰랐다. 꺾는 게 타협하는 것 같아서 돌아가는 게 실패를 인정하는 것 같아서 숨을 고르는 게 나태의 동의어 같아서. 쥔 것도 없으면서 손 위의 세상을 전부인 줄 알고 어깨가 뻐근해지고 손에 쥐가 나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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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편다. 선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제비가 하늘에 그려대던 그림이 손에 담겨 있다. 그 위에 내가 걸어온 길이 나 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보며 생각한다. 펴 본 적이 없으니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을 수밖에. 선을 읽어내 본 적이 없으니 손금이 해독하기 힘든 추상화로 보였을 수밖에. 그러니 애먼 손을 손수건 삼아 울고 있었을 수밖에.

더운 바람이 이마를 지나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정수리 위에서 작열하고 있는 태양이 눈을 찌른다. 오른손으로 해를 가리고 왼손으로 이마를 닦는다. 눈이 부시다. 사방 온통 반짝여서 눈이 시리다. 접혔던 부채가 펴진 것인지, 빛이 바람이 되어 몰려온 것인지, 그도 아니면 제비가 놓고 간 박이 선물을 내놓은 것인지. 눈부심이 여름의 눈이 되어 바닥을 채워온다. 그 위로 앞서 내려둔 낙관이 빨간빛을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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