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을 돌리고 있다. 등에는 표정이 없다. 이목구비가 없기에 등은 말을 할 수 없다. 아니,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림 속 여자는 무릎 위에 팔을 올린 채 치장을 하고 있다. '치장 중인 여자'라는 제목을 보지 않는다면 여자는 무대 위에서 내려와 발레복을 벗어던지고 숨을 돌리고 있는 무용수인 것도 같고 입욕 전 물이 받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 같기도 같다. 여자에게서 외출 준비에 들뜬 설렘이 아니라 한숨을 읽어낸다. 아래로 내려진 듯 보이는 어깨에서 길게 숨을 토해내고 있는 형상을 보는 것은 그만큼 내가 삶에 지쳐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여자의 시선에서 이방인을 본다. 초대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숙명을 타고난 이방인. 그 처지가 서글퍼져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게 된다. 하얀 천을 보고 있자니 맞은편 의자가 눈을 지나가고 물동이가 들어오고. 여자의 앞의 사물들이 이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엇이 되어 시선을 막아선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것들이, 몇 걸음만 가면 이를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이 영문을 알 수 없이 아득히 멀어 보인다. 의자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문턱처럼 보이는 저것은 벽의 것일까 문의 것일까. 여자는 대체 무엇을 응시하고 있을까.
요추의 그늘이 드러난 단단한 등을 입술삼아 숨을 뱉어낸다. 타자의 뒷모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저 너머 세상. 나는 이방인이다. 내게는 누군가 등을 거쳐서야 넘어다 볼 수 있는 불편함이 내재해 있고 받아들여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깃들어 있다. 그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어깨를 늘어지게 한다. 여자와 같은 포즈로 앉아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곱씹는다. 나는 이방인임을 서러워하는가 아니면 이방인임을 자청하는가. 이 여자의 등은 저 세계로의 다리인가 차단막인가. 이 등은 흐느끼고 있는가 웃고 있는가.
이방인성을 생각한다. 이방인에게는 온 세상이 자신의 터전이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등 밖에 있으므로, 무엇인가를 통해서만 저쪽을 넘어다볼 수 있으므로, 이방인은 그만의 흔적을 끝없이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여 이방인에게는 내부인과는 태생적으로 다른 불안이 내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불안만큼의 자유가 주어져 있기도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불안과 억울함 그것을 뒤집어 보면 내가 있는 곳을 터전으로 나아가 세계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이방인에게는 있다.
부정하고 싶지만 소외감은 사는 일을 허탈하게 한다.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살았기에, 누군가를 내친 적이 없기에, 내쳐졌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어딘가에서 밀려 나와 있음을 지각한 순간 쓸쓸함이 밀려왔었다. 세사가 구축한 구조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는 외로웠었다. 그들의 세상을 중심에 두면서 나를 소외시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쉼 없이 부딪히면서부터 어디로부터 소외된 것이었을까를 곱씹는다.
구조, 편견, 불합리, 운, 배경, 인맥. 그러한 것들이 누군가를 규정하는 틀이 되는 세상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실감한 순간, 세계는 소용돌이쳤고 나는 카오스에 휩쓸렸다. 노력이 결과가 되어 나오고 진실이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진정성이 빛을 발하는 세계가 허상이었다는 선언을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구축해 온 것이 유령과 같이 무용하니 그만 헛된 믿음을 걷으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러한가, 이 질문을 곱씹는다.
운, 구조, 배경, 재력, 학력, 집안. 그 모든 것이 때로는 나라는 존재보다 앞서 나를 규정함을 뒤늦게 안다. 그 틀만으로 나를 단정할 수 없으니 그 속에 나를 함몰시켜 보지 말고 나라는 사람의 속살을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 하지만 세사의 방식은 그게 아니었다. 알지 못했기에 억울했고 아팠고 쓰라렸다.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구조가 전부가 되고 허울 속 관계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도 하는 세상의 민낯을 보았으니 덜 흔들려야 하는 게 맞는데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척추를 꼽추 세운다. 경계가 있기에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저 너머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 등이다.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무표정하게 있는지 찡그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매끈한 등이 내게는 문이고 도화지다. 투명한 벽에 붓을 댄다. 벽에 문이 없다면, 여기에서 문을 찾지 못한다면 이것을 캔버스로 쓰면 된다. 가로막힘에 부딪혀 남긴 이 흔적이 그림이 되어 남을 것이다. 언젠가 이방인임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세상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붓질을 그만두고 문을 낼 것이다. 숨이 턱에 차오르고 서러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지만 그렇게 부딪혀가는 것이 내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