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말

by GZ

이 갈등의 원인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이 말은 곧 너도 나도 분노로 바들거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상황은 사람이 아니므로, 나를 화나게 한 건 네가 아니므로, 너에게서 돌아선 건 상황이지 내가 아니므로. 모든 것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상황에 속은 것이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왜일까.

상황과 사태를 붙들고 있어 봐야 지는 것은 내쪽인데 자꾸 부아가 치민다. 화를 내는 것은 지는 것이다. 차분하고 도도하게 목소리를 깔고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 척해야 하는데 그게 참 잘 안 된다. 잠잠해질 만하면 다시 돌아보게 된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그 일을 곱씹고 되뇐다. 그 반복이 불신을 데려온다. 불신이 떠났다가 돌아오고 돌아왔다가 다시 가고. 그게 되풀이되니 뭔가에 홀린 것 같다. 상황이란 녀석, 참 수다스럽다.

화가의 아틀리에.jpg Gustave Courbet_L'Atelier du peintre_1855

상황은 지향이다. 내 의지가 없었다 해도 상황 자체가 욕망일 수 있다. 그러한 사태에 나를 위치시킨 것은 나니까. 그리하여 내가 욕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도 나니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해 봤는데 운 좋게, 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이 한 게. 겸손으로 감싸면 그 속에 깃든 욕망이 가져질 것이라는 착각. 허탈해진다. 나는 그러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하는데도 잘 안 되고, 하고자 해서 하는데도 미끄러지고, 하고 싶어서 했는데 감감무소식인 것 투성인데. 어째 행운의 여신이 겸손의 껍질만 좋아하는 것 같아 서운해지고 만다.

의사표시가 명확한 것이 좋다. 아니야, 괜찮아, 너 먼저 해, 나중에. 이런 몽글몽글한 말로 욕망도 지향도 없는 척 모든 호의는 다 받아 놓고 은근슬쩍 엉덩이를 밀어 넣는 것은 어쩐지 모르게 불편하다. 표면적으로는 의도하지 않은 것이 되겠지. 실제로는 상황이 의도하게 만들어버리고 그 속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니 반칙인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하면 사회성이 뛰어난 것이고 전략이 좋은 것이겠지만. 어쩌면 그건 아득바득 욕망을 표하는 사람에게도 어쩌면 실례일지도.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내 것만 밝히는 것도 편치만은 않으니 이건 내 욕망의 딜레마 인지도.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욕망되는 자로서건 아니면 욕망되지 않는 자로서건 간에 타자의 욕망이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라캉, <에크리>.
소망을 모르는 자가 너인지 나인지 아니면 상황인지 단정할 수 없다. 욕망과 소망을 모르는 자가 너인지 나인지가 분명하지 않으니 이 딜레마는 영원히 계속될지도. 도돌이표 같은 이 반복이 이젠 좀 지친다는 건 나이를 먹어서인지 거리두기 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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