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에 재학 중인 나는 최근 과제, 업무에 시달리면서 다양한 글쓰기, 메모 툴을 접하고 있다. 나의 task들을 관리할 수 있는 notion을 시작으로, 효과적인 브레인스토밍 툴 miro, 협업 툴인 slack 등을 특히 적극 이용 중이다. (이 외에도 협업과 브레인스토밍 등 다양한 행위를 지원하는 툴들은 셀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애플사에 기본으로 탑재된 메모 앱이나 태블릿을 이용한 필기도 활용해보려 노력했다.
이동하거나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작업할 일이 많은데 공책과 펜, 노트북을 한 번에 옮기는 것이 신체(특히 어깨와 척추)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늘 노트북 하나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결국은 돌고 돌아 노트를 펼치게 된다.
지인 14명을 기준으로 (조사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조사를 해본 결과, 14명 모두가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거나 메모가 필요할 때 ‘수기’ 방식을 적극 활용한다고 답했다.
쓰는 것뿐이 아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e-book 버전을 구매하거나, 밀리의 서재와 같은 정기구독 서비스도 이용해봤지만 왜인지 내용이 종이책만큼 오래 기억에 남질 않는다.
종이와 펜, 종이에 인쇄된 글씨가 갖는 위력이 무엇이길래 숱한 디지털 디바이스와 기술의 발전도 종이책과 종이 공책의 수요를 막지 못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종이는 자연친화적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 판단이 비약처럼 보이거나 지나치게 포괄적인 설명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종이책에 끌리는 이유를 이보다 잘 설명할 증거는 없다.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라는 단순한 개념만으로는, 종이책과 전자책이 주는 눈의 피로도 차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빛이 책을 거쳐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살펴 보아야 하는데, 종이책의 경우 자연광이든 인공광이든 1차적으로 책에 부딪혀 반사된 빛이 들어오게 된다.
반면 전자책이나 디지털 디바이스들은 자체적으로 빛을 방출한다. 스크린 너머의 빛이 보호막과 반사판 없이 그대로 눈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특히 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독서, 메모 등을 할 때 치명적이다.
단순히 채팅을 하거나 사진을 찍을 때와 달리, 스크린 속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에 크게 몰입하여 집중하기 때문이다.
자연물과 인공물이 주는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분산된 자연의 빛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종이책을 선호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둘째, 종이는 계층성을 가진다.
단순히 페이지 간의 계층성뿐만이 아니라, 언제든 자유롭게 넘겨보고 즉각적으로 본인만의 레이아웃을 형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메모 어플상에서 단면에 그려내는 것과 달리 종이공책은 3단으로 펼쳐두고 함께 볼 수도, 반 접어서 내용을 숨길 수도 있다. 어떤 특별한 기술적 설계나 사용법 교육 없이도 누구나 그럴 줄 안다는 데에 그 매력이 있다.
책의 경우에도 다시 보고 싶은 페이지를 접어두거나 모르는 개념이 있는 부분에 페이지 클립을 붙여놓는 등,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개의 다른 behavior가 일어나게 된다. 이는 디지털 디바이스가 대신할 수 없는 부분이다.
셋째, 전자책은 종이책의 상대개념이 아니다.
Nicholas negroponte는 2010년 techonomy 콘퍼런스에서 5년 이내에 물리적 형태의 책이 죽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히 ‘전자책 지배적인 사회’가 도래할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이 발언은 상당히 위험했는데, 이는 종이책의 독자들뿐 아니라 책을 조판하는 편집디자이너, 출판가들까지도 부정하는 예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사회가 어떠한가? 여전히 독립서점이 빈번히 개업하며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 서점은 휴일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전자책은 '휴대성', 그리고 어디서든 구매 및 대여할 수 있는 '편리성'이라는 매우 획기적인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책은 ‘길에서 보기 편한’, ’가지고 다니기 쉬운’ 필요와 요구를 만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는 바빠진 현대사회에 요구되는 하나의 옵션일 뿐. 여전히 여유 있는 시간에 책을 찾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서재와 책꽂이로 빈 공간을 황홀히 메꾸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종이책 사업이 감소하고 전자책 사업이 급증했다는 수치들로 종이책의 생과 사를 논하는 것은 큰 비약인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책은 책으로서 존재한다. 시대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책꽂이는 언제까지나 인간친화적인 가구로서 침대, 책상 등과 그 결을 같이할 것이다.
예컨대 출퇴근 이동시간이 유난히 길거나, 소파에 앉아 2시간정도 여유를 보낼 시간조차 없는 사람들은 전자책으로 도서 소비를 대신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종이책을 구매할 것이며, 종이책이 주는 불편한 점(두꺼운 책의 경우 스스로 페이지가 넘어가거나, 손목이 아플정도로 무거운 점)을 못 이겨 크레마(crema)를 구매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으로 서재를 꾸미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종이 공책과 종이 책이 주는 가치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연필과 종이가 닿는 느낌, 펜마다 필기감이 다른 것, 넘길 때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 메모를 위한 본인만의 수식과 볼펜의 번짐 등은 어떠한 디지털 매체로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자 기반의 책과 필기도구라는 옵션이 생겨난 것에 감사하며, 목적에 맞게 선별하여 사용할 줄 아는 눈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