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읽은 '쓰고 싶지 않은' 이유에 대해 '쓴' 글을 방금 다 읽고 떠오른 에피소드. 이 썰은 푼 적이 있어서 아는 사람도 있겠다.
나랑 비슷한 세대는 알겠지만 매 년 한글날에는 교내에 백일장이 열려, 고작 상장 몇 개 걸고서 형식적이고 실속없는 잔치가 벌어졌다. 말이 백일장이지 자발적인 참여도 아니고, 그냥 당일 5교시 한 시간은 수업까지 다 빼고 전교생이 교실에 갇혀 원고지에 강제로 글을 써야 하는 거였다. 지금은 이런 거 안하겠지? 하여간 그 당시엔 이 무의미한 집단 뻘짓을 중학교 때 부터 고2 때 까지 5년 동안이나 했어야 했다. 그 때의 나는 야자 한 번 튀어 본 적이 없는 평범하고 순종적인 인문계 학생이었기에, 불합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쓰라고 하니까 발로 써도 쓰긴 썼고, 나에게 한글날이란 그놈의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해야 하는 좀 짜증나는 날 정도에 불과했다.
살면서 겪는 마지막 백일장이었을 고2 때의 한글날이었다(고3들은 그 시간에 문제 하나라도 더 풀으라고 학교에서 배려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 주제는 '한글' 또는 '한글날'에 관한 한 자유였고, 그 전 보다 머리가 커지니 주제의 범주를 더 확장시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매 해 그래왔 듯, 진짜 정말 너무 아주 매우 존나 쓰기 싫었던 나샛기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 해 보기로 했다. 주어진 조건이라고는 정해진 주제와, 한 시간의 창작 시간, 그리고 원고지 10장 이상이라는 분량. 자, 이 세 조건만 충족시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다시는 이 좆같은 시간을 겪지 않아도 된다.
[한글날 백일장에 대한 김지은의 견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용은 앞에서 얘기한 불합리성에 대한 팩폭이었고, 나름대로 논설문의 클리셰를 따라서 1. 서론(문제점 제시/주장) 2. 본론(원인 분석/근거) 3. 결론(해결 방안/정리) -의 순으로, 처음으로 성의를 담아 진지하게 썼다.
대충 기억나는 내용은 이러하다. 말이 전교생 백일장이지 어차피 상은 매 년 받는 애들만 또 받을 테고, 선생들도 글짓기 잘 하는 애들 꺼만 골라 검사하겠지, 그 많은 걸 다 읽지도 않지 않느냐. 그럴바에 그냥 걔네만 모아 놓고 그들만의 리그를 하는 게 모두에게 더 효율적일텐데. 한 학생 당 한 시간이면 한 학년에 300명 정도니까 600시간이라는 많은 시간이 헛되이 소비되는 건데, 그 시간을 더 의미있고 생산적인데에 쓰는게 세종대왕 입장에서도 더 뿌듯하시지 않겠느냐. 게다가 종이 낭비까지. 이 따위 걸 쓰라는 학교도, 쓰란다고 또 고분고분히 쓰는 애들도, 그 걸 질리게 봐야 하는 선생도, 나도, 블랙코미디 아니냐고. 뭐 이런 식.
반전 따위 없이 다음 날 아침 교무실로 불려 갔다. 아니 나는 정말 담임이 반 애들 꺼를 다 읽을 줄은 몰랐지...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다 읽은 건 아녔을 것 같긴 하다. 대충 훌렁 훌렁 넘기다가 제목이 눈에 띄어서 따로 꺼내 읽어 본 거겠지. 아무튼 우리 담임은 하필이면 문학이었는데, 왜 이과반 담임으로 문학쌤을 배정했는지 아직도 미스테리. 하여간 내가 잘 못 걸림.
담임도 나를 불러놓긴 했는데 막상 혼내자니 잘못했다고 보긴 그렇고(제시한 조건엔 다 들어 맞게 써 낸 글임ㅋ), 안 혼내자니 찜찜하고, 혼낸다면 정확히 뭐에 대해 혼을 내야 하는 건지 본인도 잘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지가 생각해도 내가 틀린 말 쓴 건 아니잖아ㅋㅋㅋ 그 당시 담임이 29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학생한테나 포지션이 선생이지 사회에선 29살이면 핏덩이니까... 난감해 하는 티가 났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에게 질문 딱 하나만 하고 교실로 돌려 보냈다.
"너 이거 혹시 반항심에 이렇게 쓴 거니? 너 착한 애였잖아(대사 실화임)."
"반항 그런 거 아닌데요."
진짜 순수하게 내 생각을 쓴 글이었다. 물론 굳이 쓰래서.
"... 그래. 가 봐. (한 숨)"
여기서 끝났으면 제자의 철없는 표현의 자유도 존중해 준 현명한 젊은 선생의 이야기였을텐데...
그 날 교무실의 모든 선생들이 내 원고지를 싹 다 돌려 봤고, 가뜩이나 흔해 빠진 이름에다 존재감도 없어(그 땐 진짜 평범 그 잡채였음) 나란 애를 알지도 못했던 선생들한테까지 근본없는 또라이로 낙인이 찍혔다. 사물함에 뭐 좀 가지러 복도라도 지나가면 선생들 끼리 "아ㅋ 쟤가 걔야?ㅋㅋㅋ"하며 수근댔다.
시발.
시발.
시발...
'쓰고 싶지 않은' 이유에 대해 '쓴'다는 모순이 어떤 건지, 이 책을 읽기 18년 전에 나는 이미 겪어서 알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