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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생리대

20221125


간혹 혼자 편의점에 들어와 생필품 코너에서 한참을 우물쭈물하는 남자 손님들이 있다. ‘찾으시는거 있으세요?’라고 하면 수줍어하면서 생리대 고르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한다.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서 속삭이듯 부탁한다. 여자친구가 심부름을 시킨 모양이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개인적으로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그런 종류의 부탁은 좀 하지말았으면 하지만. 자기껀 자기가 알아서 미리 잘 챙겼다면 이럴 일도 없잖아. 생리대나 임신테스터기 같은 카테고리의 심부름을 시켰을 때, 그걸 대신 사다주면 ‘역시 자상하고 멋진 내 남자친구’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면서 콘돔은 왜 항상 남자만 사는 건데? 생리대 사다주는 니 남자친구가, 미안하게도 파는 내 입장에서는 그리 멋져보이는 모습은 아니거든. 고르기도 굉장히 곤란해 하고 계산할 때에도 내 앞에서 어쩔줄을 몰라한다. 민망해하는게 너무 눈에 보여서 일부러 더 빨리 계산해주곤 한다. 가지고 돌아가는 길도 불편할까봐 검정색 봉투에 담아줬었다. 멋지긴 커녕 안타까움만.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낯설고, 어쩌면 낯 뜨겁기까지 할 물건을 어쩔 수 없이 꼭 사야만 할 때의 그 난감함. 그 기분, 나도 안다. 내가 아주 잘 알지.



나샛기도 여자라고, 중 2때 처음 생리를 시작했었다. 갑자기 옷에 묻어나온 피를 보고서 적잖히 당황. 학교에서 배운 ‘초경’이라는 걸 나도 언젠가는 당연히 겪을 일이었지만 아무런 준비도 예상도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겪게 되다니. 올 것이 왔구나. 보편적인 환경의 또래들이야 엄마나 언니에게 이야기하면 구비하고 있던 생리대나 탐폰을 같이 공유하고, 가정의 분위기에 따라서는 축하를 받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엄마가 집을 떠난 후로는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인 아부지 밑에서 자라왔으며 형제라고는 없어도 그만인 오빠 뿐이었다. 두 남자와 사는 이 집구석에는 생리대라는 물건이 있을 이유가 없던거다. 세상에, 내가 생리대를 사러가야 하다니. 여자가 생리대를 사는 것은 흡연자가 담배를 사는 것 만큼이나 특별할게 없는 일이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을만 한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던, 그 모든게 처음인 중 2 여자애에게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막막하고, 무서웠다. 친구라도 불러 같이 가달라고 할까 고민도 해봤지만 그 당시엔 나의 가정사를 아무에게도 털어놔 본 적이 없어 내가 왜 이걸 혼자 겪고 있어야 했는지 일일히 설명을 하기가, 어렵겠지만 혼자 해결해야 하는 옵션보다도 더 싫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어차피 늘 그래왔다.



지갑을 챙겨 집 근처의 마트로 나갔다. 급한대로 휴지로 응급처치를 하고 나온 터라 그 가까운 거리를 걷는 것 조차 신경쓰이고 불편했다. 괜히 누구에게 들킬 것 같고. 숨고 싶었다. 마트 카운터에는 다행히 남자 사장님이 아닌 아주머니가 계셨다.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생리대가 진열된 코너 앞에 도착했다. 그쪽 라인으로는 지나가기만 해봤지 구경도 해본 적이 없었어서, 내가 그 앞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민망했다. 마음이 급해 빨리 사고 도망가고 싶은데 종류는 또 왜 그렇게 많고,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브랜드도 소재도 크기도 너무나 다양해서 그 중에 어떤걸 사야할지 감도 안잡혔다. 지금이야 그 자리에서 검색만 잠깐 해봐도 다 나오는 세상이지만 그때의 나에겐 다른 사람 대신 의지 할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카운터의 아주머니께 물어라도 봐 볼까 했지만, 생각만 해도 수치스러워 차마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어쩌지... 엄마랑 같이 살 때 엄마가 쓰던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뭐 였더라... 아, 그래 이거 같다, 위스퍼. 이걸로 사기로 하고, 크기는 뭘로 사야하지? 소/중/대, 옷 사이즈처럼 스몰 미디움 라지 같은 건가? 그럼 오버나이트는 뭐지? 밤에는 뭐가 다른건가? 일단 잘 모르겠으니 그냥 가운데 꺼로 중 사이즈로 사보자, ‘중’ 이니까 평균이지 않을까?





하나를 얼른 집어 카운터에 올려두고 누가 볼까봐 몸으로 가렸다. 슬쩍 둘러보니 다른 손님은 없는 시간이었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계산을 하는동안 아주머니는 태연하게 늘 하던 일을 할 뿐이었을테지만 나는 내가 생리대를 산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너무 창피해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잠깐이었을 그 시간이 초조함에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고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거스름돈을 받고 겉옷에 숨겨 도망치듯 뛰어 나왔다.



집에 도착해 화장실로 직행했다. 마침 아부지와 오빠가 없는 시간이었지만, 갑자기 그 중 누군가 불쑥 올까봐 집에 와서도 마음이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렵게 겨우 사오긴 사왔는데 아직 더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나는 생리대를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전혀 몰랐다. 산 넘어 산. 대충 생리대의 접착면이 속옷에 닿는 부분이라는 건 추측해 볼 수 있겠지만, 앞/뒤도 모르겠고, 정확히 속옷의 어느 위치에 붙여야 하는 건지 이거 당최 알수가 있나. 생리대 포장지 겉면에도 사용법은 적혀 있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 보다가 실수로 접착면끼리 서로 붙어버려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떼보려다가 결국 그 하나를 망가뜨렸다. 짜증이 났다.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나왔다. 우리반 누구누구는 첫 생리를 시작했을 때 가족들이 모여 함께 축하도 해 주고 케이크도 잘랐다던데. 그런 것 까지는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저주받은 것 같았다. 한동안 차가운 타일바닥에 맨 엉덩이로 주저앉아있다가 타일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것을 뜯어 다시 시도 해봤다. 옆으로 튀어나온 부분(‘날개’라고 부르는 그 부분)이 속옷을 감싸 고정하는 부분인 것처럼 보였다. 그쪽이 가운데로 오면 되는 것 같았다. 씻고서 착용을 해봤다. 처음 느껴보는 굉장한 불편함에, 이게 정말 맞기는 한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딱히 알아볼 도리도 없고 거기서 뭘 더 해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 방으로 가 누웠다.


여기까지가 내가 처음으로 생리대에 입문했던 기억.



그때는 몰랐지만,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인 줄 알았겠지만,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또 앞으로 같은 일을 겪을 수 있는 어린 친구들도 있겠지. 그 녀석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컨텐츠를 뭐가됐던 오래전부터 만들고 싶었었다. 웬걸. 어느날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유튜브에 아주 유익한 영상을 누군가 이미 만들어 올려두었다. 그걸 기획한 사람도 분명 나와 같은 상황을 겪었으리란 걸 영상을 보며 직감적으로 느꼈다. 댓글창은 초경을 겪어 시청했다는 학생들의 감사 인사로 가득했다. 별다른것 없이 단지 자세한 현실고증적 설명만 내내 나오는 영상이었지만, 지금껏 유튜브에서 본 어떤 훈훈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보다도 나에겐 더 감동적인 컨텐츠였다.



힘들었던 그날이 여전히 매달 한번씩 떠오른다. 그리고 상상을 하지. 만약에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여행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시점의 나샛기에게, 현재의 내가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단 한번의 유일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그날로 돌아갈테다. 놀란 나를 다독이고서 생리대를 사러 손잡고 함께 가 주겠지. 매대 앞에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고 골라주고 집으로 와서는 사용법을 강의해 줘야지. 생리 경력 20년의 노하우를 가득 담아서.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나도 케이크를 사주고 돌아올 수도 있겠지. 뭐 치킨이나 피자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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