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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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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9


몇 주 전 친구녀석의 추천으로 처음으로 ‘사주’라는 걸 봤다. 늘 내가 걱정인 맹히씨가 나 모르게 종종 보긴 했었겠지만 어른이 되어 내가 직접 해 본건 처음이니까 나름대로는 의미가 컸다. 전반적으로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기대치 못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초년운이 좋지 않은 편이었으니 앞으로의 30대 후반부터는 그동안의 삶보다는 나아질 일만 남았다고. 물론, 안다. 모든 건 결국 나에게 달려있고, 두고 봐야 알테지.



나는 사주에 갖고 태어나기를, 감이 좋다고 했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을 믿으면 된다고, 그런 면에서 이미 잘하고 있다고 하셨다. 내가 어떤 결정을 하던 항상 반대했던 가족들을 떠나 혼자 살게 된 것도 나에겐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가족으로부터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때부터, 어떤 걸 배우려 하거나 무슨 일을 벌이던 간에 가족들은 나의 선택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한심하게 생각했다. 남들처럼 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대기업에 입사하기를 바랬다. 하라고 하니까 더 하기 싫어져서, 그래서 반항을 한 건 아니었다. 싫은 건 그냥 죽어도 하기 싫은 걸 어떡해.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 나는 어릴적부터 누구보다도 하고 싶은게 항상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뿐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궁금해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걸 할때엔 그걸 왜 하는지 이해라도 해 보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나중에는 그냥 내가 하는 것마다 다 싫어했다. 내가 진심을 담아 하는 것들을 부정하는 건, 나를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결국엔 정말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더라.


아무리 가족이라도 사람인지라 서로의 생각은 다를 수 밖에 없기에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내 딴에는 그렇게 합리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좀 더 크고 보니 친구들 중에는 부모나 형제들에게 늘 조건없는 지지를 받는 녀석들이 있더라고. 교과서처럼 바람직해 보였다. 부러웠다. 저게 정상적인 구조라면, 그렇지 못한 나는? 그쯤되니 정말로 내가 문제아인걸까 하는 생각이 아주 오랫동안 자리잡았다. 나는 언제나 이 집의 걱정거리였다. 내 소신은 고집과 아집으로 취급됐다. 정말 내 선택이 매번 틀렸기 때문에 단 한번도 응원받을 수 없던걸까.



이런 면에서 위로가 됐다는 말이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걸, 어쩌면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 제 3자로부터 확실히 들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감사하게도 상담해 주신 분은 그 부분을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거다. 점이든 사주든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시피한 것들을 맹목적으로 신뢰할 순 없겠지만, 이 부분은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이정도 쯤이야. 나는 그 말을, 그리고 나샛기를 믿기로 한다.





고양이에 관한 것도 그랬다. 아직도 가족들은 우리집에 고양이가 몇 마리나 되는지 모를뿐더러 관심도 없다. 먹이고 재우고 아픈 아이들을 거두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나서진 않는 이 일에 대해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다. 도와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왜 남이 하면 ‘좋은 일 하시네요’고, 내가 하면 ‘저 년 저거 저러다 시집도 못가지’가 되느냐는 것. 물론 나도 남으로부터는 ‘좋은 일 하시네요’란 상투적인 말 많이 들어봤다. (물론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안다. 감사하지만, 미안하게도 당신들의 입으로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나쁜 일도 아니잖아. (대부분은) 불법적인 것도 아니고. 크게 보면 생명을 구하는 일인데. 상담자 분은 ‘덕을 쌓는 일‘이라고 부르셨다. 그 ’덕‘도 좋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덕질'을 쌓는 것에 가까운 편이긴 함. 고양이 최고. 하여간 의도치않게 저절로 덕을 쌓게 되는건 좋긴 좋은거니까 그렇다 치고, 주변에 늘 사람이 많지만 그럼에도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사주이기 때문에, 동물들과 함께하는 것이 정서적으로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격하게 킹정.



가족들은 고양이들이 결국은 나의 발목을 잡는 존재라 했고, 나와 혈연관계가 없는 주변인들은 내가 고양이들을 살리는 일이라 했다. 자, 이제 내 입장에서 팩트를 조져줄게. 댁들 모두 틀렸다. 나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는 가족이라는 작자 본인들이고, 내가 고양이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들이 나를 살렸다. 이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우울증을 씨게 앓아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해 봤다는 말은 아니다. 나도 우울한 순간들이 있고 내가 쓴 글이 내가 읽어봐도 우울함의 산물 같기는 하다만, 내가 인지하는 정도의 질병으로써의 ’우울증‘이란 걸 겪어본 적이 있었나 모르겠다. 물론 내 자신이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안다. 근데 문제없는 사람이 어딨어. 나는 그저 행복해 본 적이 없었어서 그게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함. 그리고 죽고 싶기는 커녕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의외로(?), 명확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은 없었다. ’지금 내가 갑자기 어떻게 돼도 미련이 남는 건 아무것도 없긴 하네‘ 정도의 무기력한 생각은 해봤지.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생각이 내가 나를 끝내는 것을 원하도록 직결되는 문제는 전혀 아니었다. 그럼 그건 왜 일까.



나는 천성이(사주에 까지 나올 정도로) 게으른 사람이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안해도 심심한 적이 없고, 하다하다 요즘엔 먹는 일마저도 귀찮다. 이런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고양이들이다. 딸린 입이 많으니 돈을 개같이 벌 수밖에 없고, 열아홉의 털뿜뿜을 견디려면 청소를 존나게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나마도 이 녀석들이 나를 사람답게 살게 하는 거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거라 해도, 나에게는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준다.


이런 육체적인 노동의 동기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필요의 조건도 충족되어주었다.



고등학생 때, 우리 반에 아주 묘한 교생 선생님이 실습을 나온 적이 있다. 듣기로는 손금 같은 걸 볼 줄 안다는데, 단순히 손금의 시각적 정보만이 아닌 상대의 기운을 느끼고 해석을 해주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 이과와 문과를 갈등하던 친구들은 쉬는 시간마다 그 선생님을 찾아가 어느 길이 더 본인에게 맞을지 진로에 대한 상담을 요청했고, 나도 신나서 줄을 섰었다. 나는 이미 이과로 마음을 정했지만 그냥 호기심에.


선생님은 손금을 보기도 전에 내 손을 잡자마자 뼛속부터 이과생이라고 하며 웃었다. (당시엔 별생각 없었지만 에세이를 쓰는 지금은 이 말에 뼈가 다 아프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 상담해주던 것과는 달리 내게는 한마디를 더 보태셨고, 나는 그 말을 잊지 못한다.


“너는 네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인데, 그걸 줄 곳이 없네...”





고양이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이 녀석들이 없었다면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을 수도 있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죽을 만큼 힘든 적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오히려 더 죽도록 살고 싶었다. 살고 싶은 내가, 내 살길을 직감적으로 찾았던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건 아주아주 옳은 길이었다고.


그렇다면 죽음을 택한 사람들의 이유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줄 곳이 없어서‘ 였을까.



이십대 초반,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던 사람이 자살을 한 건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가는 그 길부터도 낯설었다. 친구가 예쁘게 웃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곳의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끼리끼리 놀던 무리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 친구는 공부도 제일 잘 하고 예쁜 친구였다. 할 줄 아는것도 참 많았다. 피아노도 연주회에 나갈 만큼 잘 쳤고, 모르는 만화책이 없을 정도로 애니메이션도 좋아했다. 글씨도 잘 써서 새학기마다 반 친구들이 그 친구에게 새 교과서를 내밀며 자기 이름을 써 달라고 하곤 했다. 나와는 같은 이과반이었고 진학한 대학은 당연히 달랐지만, 방학 기간동안 우연한 계기로 운동을 같이 다녔었다. 우리가 깊이 친한 건 아니었어도, 다른 녀석들은 관심없어하는 킥복싱을 같이 배울 친구가 서로에게 필요해서였다. 그걸 계기로 조금 더 가까워지긴 했었지. 다음 방학때도 도장에 같이 다니기로 했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 찾아간 자취방에서 발견됐다고 들었다. 바보같이 착하기만 하던 그 친구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각각의 유언을, 공책 여러권의 분량으로 친절하게 남겨두고 떠났다. 가족들은 조문객들을 위해 그 유언장을 장례식장 입구에 비치해 두셨다. 그 중 ’지은이에게‘라고 시작하는 그 예쁜 글씨도 있었지만, 나는 내 이름이 워낙에 흔해서 그 ’지은이‘가 나를 말한 건 아닐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너에게 그 정도의 사람일 자격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는 그 때 그 ’지은이‘가 나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기도 하지만.


친구의 어머님은 우리를 붙잡고 많이 우셨다. 재수하고 싶다고 할 때 하게 해줄 걸, 휴학한다고 말했을 때 그러라고 할 걸, 하시면서. 너희는 부디 하고싶은대로 하며 살라고 손을 잡고 부탁하셨던 게 기억난다.



나는 가족들에게 애물단지였다 해도 그 친구는 엘리트인 오빠들이 위로 셋이나 있는 집의 귀한 막내딸로 곱게 자랐기에, 당시엔 나에 비해 부족할 것이 하나 없어보였던 그 친구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든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친구와 나의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재주가 많은 만큼 친구도 하고 싶은 것, 사랑을 주고팠던 것들이 참 많았을텐데. 원하는 길이 무언지 물어봐 줬더라면. 그 이야길 들어줬더라면. 그 선택을 존중받을 기회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살다가 가끔씩 가장 예쁠 때 먼저 보낸 그 친구를 생각한다. 살았다면, 그 어떤 일을 했더라도 끝내주게 멋진 사람이었을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나 생각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가 살게 됐을 삶 만큼 멋지게 살아 낼 자신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적어도 나는 꼭 네 몫까지의 행복한 인생을, 악착같이 살다 가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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