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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노트북

20221121


몇달동안이나 고민만 하느라 시달렸던 노트북을 드디어 주문했다. 이과출신이지만서도 기기엔 별 욕심도 관심도 없는지라 배경지식이 얕은 편이다보니 선택장애가 왔다. 그래서 뻔하게도 '그램'과 '맥북'을 후보로 정하고 주변의 의견을 물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건 당연하기에 표가 확연히 갈렸다. 선택의 이유도 서로 달랐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볼수록 혼돈의 카오스였다. 이래가지고는 올해안에 못바꾸겠다싶어 결국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했다.



* 테크충 배씨



배씨는 내가 20대때 영화관 영사실 일을 배우기 시작하며 알게된 분이다. 각종 영상/음향 기기를 다루는 일이다보니 영사기사님들은 기본적으로 그런쪽에 밝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는데, 그들 중에서도 배씨의 지식을 따라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험치가 더 많을, 웬만한 높은 직급의 실장들보다도 실력이 좋았다. 실제로도 문제 발생시 해결을 위해 책임자가 배씨에게 의견을 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배씨의 직급은 고작 '미소지기'였는데도. 막 일을 시작한 내 입장에서는 선배 미소지기의 엄청난 영향력에 부담감을 느끼기보다 그냥 존나 멋있었다. 배씨는 테크충일 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도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뭘까'하는 생각이 든 적이 오조오억번. 사는데에 있어서 경험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던 나였기에 이런저런 누적된 잡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그저 존경스러웠다. 이런 능력은 단순히 똑똑하기만 해서는 저절로 생기는게 아니다. 어떤 분야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깊게 알기 위해서는 미친듯이 그 대상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천재는 절대 오타쿠를 이길 수가 없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배씨를 보며 생각했었다. 나도 배씨와 같은 나이를 먹었을 때에는, 저 정도의 노련한 덕력을 갖추게 될 수 있겠지? 어떤 특정 분야에서라도 말야.



지금의 나는 배씨의 그때 나이를 이미 훌쩍 뛰어 넘었고, 아직도 간간히 배씨의 도움을 받고있다. 배씨는 나이가 더 들어가는 사이 도저히 범접할 수도 없는 내공이 쌓여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니즈를 다각도로 파악한 후 그에 알맞은 성능을 제공하는 최적의 모델을 골라주었다. 나는 배씨를 대단히 신뢰하지만, 어떤것도 무조건적으로 맹신해선 안된다는걸 안다. 나에게 선택권을 추려 주었을 뿐 최종적인 결정은 나의 몫이었다.





* 소프트웨어 회사 직원 김씨



김씨는 글로벌 대기업인 M사에 헤드헌터를 통해 스카웃된 직원임에도 의외로 경쟁사 애플의 맥북을 적극적으로 권했었다. 이새끼 이거 산업스파이 아닐까 하는 킹리적 갓심. 다른 친구들 역시 나에게 더 어울리는 것은 맥북이라며 내가 당연히 아이폰을 쓰고있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런 오해들을 이해할 순 없지만 애플사의 왠지모를 '힙'한 이미지에서 비롯된 편견일 것이므로 기분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현재 블랙베리를 사용중이며, 블랙베리 이전엔 LG폰을 사용했다. (내가 쓰면 다 망한다.) 심지어 첫 스마트폰은 모토로라였다. 내 취향은 역시나 애플의 '힙'과는 거리가 먼 극단적 비주류인 것 같네. 하지만 취향과는 별개로 배씨가 지적한 확장성의 문제가 우려되어 맥북은 최종적으로 탈락했다. 김씨가 '트랙패드'같은 편리한 부가기능으로 어필하기도 했고 예쁜것도 사실이라 오래 고심하였으나, 일단 맥북을 사버리면 그게 모든것의 시작일테고, 그 이후의 모든 연관 기기는 애플로 구매해야 하는 늪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김씨도, 그리고 박씨도 그러했듯이.



그 후 배씨에게 받은 피드백으로 김씨의 의견도 물어보았다. 김씨는 내가 최종적으로 고려중인 모델의 단점을 짚어 주었다. 역시. 이래서 큰 결정은 여럿이 함께 해야하는 건가보다. 16인치라는 사이즈가 체감했을 때엔 더 클 것이라는 것, 그리 가볍지 않은 무게와 조금은 아쉬운 SSD용량, 저렴하기만 하고 믿을 수 없는 판매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기만 한다면 성능은 넘치게 좋은 편이니 구매 전 한번 더 고민해 보라는 조언. 현실적인 좋은 지적이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최종적으로 결제한 제품은 결국 '그램'도, '맥북'도 아닌 '울트라북 엣지' 였다. 사용 용도에 적합한 스펙은 배씨의 도움을 받았고, 김씨가 지적했던 외적인 부분은 기존에 사용중인 노트북과 비교했을때 더 불편한 점은 없겠다는 판단으로 감수하기로 했으며, 용량은 사용하다가 불편해졌을때 추후에 업그레이드 해도 되는거니까 써보고 생각하기로. 충고대로 최저가 사이트가 아닌 LG 공식 인증 사이트에서 조금 더 값을 치르고 결제했다. 사은품 혜택도 빼놓을 수 없지. 하드웨어적인 사은품은 쓰잘떼기 없지만, 작업시 필요할 소프트웨어 증정은 꼭 챙길만 했다.



충동구매가 습관이던 내가 이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으며(근 며칠은 변비에 시달렸다. 결제 후, 거짓말처럼 묵은 숙변을 싹 비워냈다. 초민감자의 삶은 이렇게나 피곤하다.) 오랫동안 신중히 함께 고민했으니 그만큼의 가치가 있길. 그리고 본인들의 일처럼 시간을 내어 적극적으로 알아봐주고 같이 고민해준 두 너드에게 매우 감사하다. 처음엔 카톡으로 시작했다가 답답함에 전화를 건 두 사람의 나는 알 수 없는 그 열정이 귀여웠다. 사준건 아니지만 잘 쓰겠다.



새 글은 새 노트북으로 쓰고 싶었다. 그래서 글이 늦어진 것도 핑계 겸 사실이다. 빠르면 내일은 받을 수 있겠지. 새 노트북으로 쓴다한들 뭐 얼마나 더 좋은 글이 나오겠느냐마는.



상담도중 배씨가 최근 와이프분에게 아이패드를 사준 얘길 들었는데, '그 비싼 걸 사서 색칠놀이 밖에 안한다'며 투덜거렸다. 그럼 그걸로 뭘 해야하냐고 물으니 '... 가계부?' 하다가 곧 '색칠놀이면 됐네, 그 정도면 된거 같아. 원고지 대용으로 노트북 사는 애도 있는데 뭐.'라고 하셨다. 나도 답장했다.



"예술은 원래 돈이 많이 들어요. 너드가 뭘 알아."



취미는 장비빨. 불변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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