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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Sep 25. 2023

낭만에 대하여

20230925


한동안은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맛에 빠져서 매일같이 타자기를 치다가, 요즘엔 또 만년필에 빠져서 손글씨를 쓰곤 했다. AI니 챗GPT니 뭐니 세상은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는데 어찌 된 게 나는 오히려 점점 더 역행하고 싶은가 보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이제 와 그런 세상이 지겨워 갑자기 이러는 것도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예전에도 수동 필름 카메라로 찍어 현상하는 사진을 더 좋아했다. 조리개가 열리는 순간 필름이 빛을 입으면 필름 표면의 화학적 반응으로 인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바뀌기 때문에, 디지털 방식의 카메라와는 달리 셔터를 누르는 한 컷 한 컷이 신중하고 또 소중했다. 그건 타자기도 마찬가지다. 종이에 잉크가 묻은 활자를 찍는 방식이라서 한 번 찍으면 오타가 났어도 어쩔 수가 없다. 수정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한 문장을 써도 고심해서 쓰게 된다. 아날로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때 의도한 피사체에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고 빛의 방향이나 플래시의 유무, 필름의 감도에 따라 셔터의 속도를 조절하며 최적의 노출로 원하는 이미지를 담아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처럼, 타자기로 글을 쓰는 것은 매끄러운 작문을 하는 데에도 아주 유익한 훈련이 되었다. 쓰고 싶은 문장을 쓰기 전에 머리로 이미 수도 없는 수정을 거친 후 최종_진짜최종_최최종_최종본.txt이 떠올랐을 때 비로소 자판을 누르며 출력하니까, 완벽하지 않은 결과물이라 해도 더 애착이 붙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렇게 노트북의 키보드를 눌러 즉각 수정하며(혹은 문서 작성용 프로그램이 자체적으로 교정해 주는 대로) 쓰는 글과는 글맛의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물론 변화된 세상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런 것도 분명 있을 거다. 주변의 모든 것이 편리성에 기대어 점점 더 빠르게 디지털화되어왔고 그건 우리를 갈수록 더 멍청하게 만들었다. 문서 프로그램의 자동 맞춤법 교정에 의지해 글자를 쓰다 보니 자체적인 어휘력이 심각하게 떨어졌고, 스마트폰 문자창의 자동완성 기능으로 인해 생긴 별별 실수담은 밈이 됐다. 요즘 애들은 문해력까지도 없어 오죽하면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적혀 있는 사과글에 발끈하기까지 했다. 심심한ㅋㅋㅋ 사괔ㅋㅋ라며 조롱하기 바쁘더라. 멍청함은 발전의 속도와 정비례해 자꾸 가속화되기만 해서 사람들은 이제 지들이 뭘 모르는지도 모른다.

사진도 마찬가지. 발명 이래로 비전문가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 이런 시대는 지금까지 없었다. 스마트폰에 탑재된 고성능 카메라의 사양은 점점 더 좋아져 이제는 달의 표면까지도 소름이 돋을 만큼 선명하게 찍힐 정도지만, 움직이는 피사체를 찍을 때 실내에서는 왜 유독 더 흔들리게 나오는지, 어두운 밤에 플래시를 터트렸는데도 멀리 있는 저 배경은 왜 사진에 나오지도 않는지, 내 눈에는 또렷이 잘만 보이는 별들이 왜 보이는 그대로 나오지 않는 건지, 흰 종이가 왜 그대로 하얗게 나오지 않는 건지 정확히 알고서 찍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그게 궁금하기는 할까? 어차피 보정 하면 해결될 일이고 필터나 쓰면 되는 데 뭐, 데헷!


쓰고 보니 좆도 꼰대 같긴 하다. 어떻게 보면 지적 허영심인가 싶기도 하고. 근데 그렇다기엔 나 진짜 상식도 없고 개무식한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여전히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길 듣고 ‘놀란’적이 있었다. 라임 개쩌네. 하여간 그 고집스런 방식에 리스펙트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봐도 꼰대 같았다. 그는 스마트폰도 전혀 사용하질 않아서 업무에 관련된 모든 것은 ‘전화기’로 통화한 후 직접 만나서 결정한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알고 있는 영화계 관계자들의 생각은 하나 같이 비슷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해도 될 정도로 인정받은 감독이니 망정이지, 쩌리였으면 그런 식으로 일하다가는 이 바닥에서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고. 역시 뭐가 됐든 존나 잘 나고 볼 일이다. 능력이 개쩔면 고집부려도 시발 다 통함.


감독 이야길 하니까 생각났는데, 내가 예전에 영사실에서 일했던 그때는 하필이면 영화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바뀌는 건 아니라서 한동안은 두 가지 방식 모두 사용됐던 시기가 있었다. 처음엔 8개 관에 디지털 영사기가 두 대 정도 들어왔었다. 그러다가 결국 나머지 여섯 대도 들어왔는데, 아날로그 영사기를 뺀 게 아니라 한 관마다 영사기를 두 가지 방식 모두 놓고서 쓰는 거였다. 상영 스케줄에 따라서는 하루에도 한 관당 디지털 영화를 상영했다가도 아날로그 영화를 상영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아날로그 필름도 다룰 줄 알았어야 했고, 디지털화된 영화 파일도 작업할 줄 알아야 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는 우열의 범주로는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장단점이 서로 확연히 다르다. 나는 그런 걸 배우는 게 참 재미있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보통은 개봉 며칠 전에 개봉 예정인 영화의 실물이 극장으로 입고됐었는데, 영사실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날로그 필름의 입고는 당연히 점차적으로 줄었다. 그러다가 결국엔 디지털 방식의 하드디스크만 들어올 뿐이었다.

필름 영화는 초당 24프레임인 필름이 평균 한 시간 반 정도의 러닝타임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으로 릴에 감겨 들어오기 때문에 필름 자체의 보호를 위해서 하나의 큰 뭉치가 아닌 작은 단위로 나뉜 여러 벌이 들어오게 되는데, 실제 영화 상영 시엔 중간에 끊기는 장면이 없어야 하니까 나누어진 필름이 입고 되면 순서대로 이어주는 작업을 거쳐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상영이 종료된 영화는 반대로 다시 나누어서 따로따로 번호가 적힌 통에 담아 출고. 이렇게 분할된 필름을 잇거나 편집하는 수고로운 작업은 디지털 영화의 수요와 공급이 늘며 현저히 줄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업무량을 떠나서 굉장히 섭섭했었다. 내가 그렇게나 좋아했던 영화라는 매체를, 그 안의 어느 장면과 배우들의 얼굴을, 연속된 프레임 하나하나 속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듯한 미세한 속도감의 차이를, 각 프레임의 싱크에 맞는 대사들과 각종 사운드 효과 정보가 저장되어있는 작은 띠선을, 영사기에 걸어 일정한 속도로 필름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작은 톱니 구멍들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는 것이.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중독적이었던 필름 특유의 화학적 냄새를 더는 맡을 수 없다는 것이.


그러다가 정말 너무 오랜만에 필름 영화가 입고됐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이었다. 정통 아날로그 방식으로 필름으로 촬영하여 필름으로 상영.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그가 ‘반드시 필름 상영의 조건이 아니라면 해외로는 아예 수출하지 않겠다’고 배급사에 바득바득 우겼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필름만이 자신이 의도한 것을 온전히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역시 뭘 좀 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가끔 의문이 들었다. 수백, 수천 명이 참여해 몇 해가 넘는 기간 동안 고뇌하며 만들어낸 커다란 창작물이, 고작 데이터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건 너무 허무하고 무섭잖아.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을 과연 실재한다고 할 수나 있을까. 종이의 냄새와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e-Book이나, 창작에 영감을 준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남긴 ‘Thanks to’ 따위는 없는 디지털 음원이나.

안타깝게도 후속작부터는 더 이상 필름 상영만 고집할 수가 없었고, [인터스텔라] 때는 국내 기준 전국의 상영관 중 단 한 곳에서만 필름으로 상영했다는 기사가 있다. 생각해보니 완전히 디지털 상영으로 바뀐 후에도 아날로그 영사기는 몇 년 간이나 철거하지 않은 그대로 방치됐었다. 이게 다 저 권위적인 최종 보스의 혹시 모를 변덕 때문일 거라는 썰이 합리적 의심을 받았지만, 세계의 영화판이 한 사람의 똥고집에 의해 돌아가는 건 아닐 테니 아마도 영사기 회사와의 계약과 같은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거다. (극장에서 사용하는 영사기 제작사는 독일, 미국 등 국외 회사이고, 영사기 자체가 상당한 고가이기 때문에 구매가 아닌 렌탈서비스와 같은 대여 방식으로 계약된다고 알고 있다.)


현재의 그는 필름으로 촬영하되 디지털로 상영될 영화를 만든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적응이 참 당연하면서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절충선에서 타협한 것 같기도 하고. 나라고 뭐 다르겠어. 스마트폰이면서도 수동식 쿼티 자판을 탑재한 애증의 블랙베리 유저인데.


조금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아날로그의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주변에 있어 다행이다. 돈을 들여 프리미엄이 붙은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친구들도 있고, 필름 카메라를 아직 가지고 다니는 친구도, 알고 보니 나보다 먼저 타자기를 접한 친구도 있었다. 지독한 만년필 덕후도 있어서 나는 사실 그 친구로부터 만년필에 입문했다. 우리는 이 친구들을 ‘뭘 좀 아는 녀석들’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찍어낸 듯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미가 느껴지는 독보적이고 고유한 것들. 약간의 수고스러운 행위마저도, 그 과정조차도 의미 있고 즐거운 것들. 그리고 그 가치를 알고 있는 녀석들.


최근엔 내가 푹 빠져있는 만년필을 친구에게도 선물했었다. ‘요즘엔 정말 예전처럼 손 글씨 쓸 일이 도무지 없네’라며 글씨를 오랜만에 써 본다는 말에 괜히 씁쓸해졌다. 각종 SNS와 카톡 같은 메신저 서비스에서나 글자를 사용하지, 손 편지는커녕 메일계정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벌써 다 구석기 시대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꼭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멀게만. 며칠씩이나 우편함을 확인해 가며 기다리던 편지를 드디어 받고서 행복해하던, 휴대폰이 없어 공중전화기 앞에서 줄을 기다리던, 다음 사람을 위해 남은 동전을 놓고 가던 낭만은 어떻게 이렇게도 빨리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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