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친구와 함께 재미로 신점을 보러 갔다가 갓 신내림을 받아 신빨이 좋다고 소문난 그 무당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었다. 나에게 “네 집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 있다”고 했다. 워낙에 수집을 좋아하면서도 잘 버리지는 못하는 성격이라 갖다 버려야 할 게 산더미라는 건 나도 알지만, ‘없는 게 나은 물건’도 아니고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니. 이거 뭐 호크룩스도 아니고. 무속인으로부터 저런 말을 들으니까 괜히 무섭고 찜찜했다. 나는 그게 뭐길래 이런 말을 하시느냐고 물었고, 그는 자기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돌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돌멩이는 예뻐봤자 돌이라 주워다가 집에 둔 적도 없는데 웬 돌이래. 여기 용한거 맞아? 무슨 돌을 말하는 거냐고 다시 물으니 꼭 자연적인 돌이 아니라 해도 도자기도 흙으로 빚은 거니까 화분이나 그릇일 수도 있다며 집 가서 잘 찾아보고 되도록 빨리 정리하라고 했다. 하여간 그게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돌이라고 하면서.
나는 그 돌이 뭘 의미했던 건지 나중에서야 알았다. 우리 집엔 죽은 돌들이 있었다. 남들보다 뭐든 느려서인지 마음 정리도 느려 터져가지고는, 죽은 고양이들을 떠나보내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첫 고양이 만수는 '19년도 여름, 만 열두 살의 나이로 말년에 짧은 투병 생활을 하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같은 해 가을에는 1년이 넘도록 밖에서 챙기던 길고양이 하이바(바가지를 뒤집어 쓴 것같이 똑 떨어지는 무늬가 머리 위에 있었다.)가 우리 가게 앞에서 로드킬로 별이 되었다. 짧은 기간에 두 번의 장례를 치르면서 두 아이 모두 메모리얼 스톤으로 만들어 가져왔다. 내가 살아 있는 한은 늘 내 눈과 손이 닿는 곳에 있었으면 해서. 죽은 두 고양이는 작은 스톤이 되어 예쁜 유골함에 넣어져 집 한켠에 보관됐다. 만수는 살던 집에 다른 형태로 남게 된 거였지만, 하이바는 죽어서야 집으로 들이게 된 꼴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데려오는 거였는데.
우리 집에 종종 오던 당시의 남자친구는 화장한 잔해들을 뿌리지 못하고 굳이 보관에 용이하도록 돌로 만들어서 유골함에 ‘모셔’놓은 나에게, 돌보는 고양이들이 죽을 때마다 매번 또 그렇게 할 거냐고, “납골당인줄ㄷㄷㄷ”이라면서 비꼬는 투였다. 집에 고양이가 한둘이 아니니까 해가 갈수록 유골함이 늘어만 갈 테고, 그러니 한두 마리만 키우다 보낸 다른 여느 집과는 얘기가 다르다는 거였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고양이들과 죽은 고양이의 유골함이 한 공간 안에 있는 게 어찌 보면 기괴하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멀리서 전화로 소식을 들은 엄마도 내 선택에 부정적이었다. 그런 걸 간직하는 게 다 마음의 짐이 되는 거라면서. 나도 이 둘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바로 없애기는 싫었다.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갖고는 있어야겠는 그 이유를 나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놓아 줄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은 녀석의 털 한오라기, 수염 한 가닥이 아쉽고 소중해서 자주 쓰던 물품과 함께 보관해 가지고 있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편이 더 괜한 의미 부여 같았다. 만수가 쓰던 물건들은 그저 남아있는 다른 고양이들이 쓰라고 버리지 않고 있던 것뿐이었고, 길에서 나고 자란 하이바는 그럴만한 것조차도 없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후에 그의 흔적이나 유품을 간직한다고 해서 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전혀.) ‘죽음’이라는 건 그냥 거기서 끝인 거다. 내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기린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는 건 없더라. 화장하든, 흙에 묻어주든, 비싸고 좋은 관과 수의를 입혀 보내든, 경치 좋은 곳에 뿌리거나 묻든, 살던 곳에 뿌리거나 묻든, 좋아하던 간식을 그걸 먹지도 못할 죽은 몸과 함께 묻어주든 우리의 바람처럼 정말로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서 편안해진 게 맞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기일에 제사 비슷한 걸 지내든, 메모리얼 스톤을 목걸이나 반지로 재가공해 늘 몸에 지니고 다니든 간에 우리는 녀석들의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도 없고, 보드라웠던 털을 한 번만 더 만져볼 수도, 말랑하고 따듯했던 체온을 느낄 수도 없다. 결국 그런 건 다 남은 사람들의 자위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은 우리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같은 거. 각자 다른 방식의 지푸라기들. 다 소용없다.
이런데도 손에 꼭 쥐고 못 놓고 있다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결심이 섰다. 어떤 특별한 계기도 없이, 문득 이제는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했던 건 그냥 시간뿐이었던 것 같다.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의 시간과 그걸 인정하는 데에 걸린 시간. 내가 언젠가는 이렇게 마음을 바꿀 거라는 걸 어쩌면 예전의 나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바뀔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강요하지 않고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자신의 결정을 차분히 기다려 준 과거 여러 시점의 나에게 새삼 고마웠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번에 엄마가 올 때 집에 있던 유골들을 넘길 테니 엄마가 가져가서 나 대신 엄마네 산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적 갈등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말만 뱉어놓은 건데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결심이 서고 나니까 그 이후에 죽은 아이들에게는 그런 소모적인 집착과 미련이 붙지 않았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뚜렷한 죽음의 증거물을 뭔 전리품이라도 되는 것 마냥 남겨 찬장에 쪼르르 진열해 두지 않아도 먼저 간 아이들은 내 기억 속에 온전히 남아있었고, 그러니 그들의 흔적을 간직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책감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살구는 살구나무 아래에 묻어주고, 엄지는 엄마를 시켜 산에 뿌려주려고 화장만 했다. 비슷한 시기에 데려와 키우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죽은 물고기 깜깜이와 백설이도 가게 맞은편 화단에 나란히 묻어주었다. 아마 흙 속의 작은 벌레들이 서서히 분해하면서 더이상은 고양이도 물고기도 아니게 되겠지만,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순환적 현상이니 그걸로 가여워할 일이 아니다. 주어진 제 명대로 양껏 살다 가지 못한 것이 가엾을 뿐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왔다. 나는 몇 년을 데리고 있던 만수와 하이바의 스톤, 그리고 엄지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죽음의 무게 때문일지, 체감으로도 괜히 무겁다고 느껴졌다. 그럴 리가. 그냥 도자기에 담겨 있어서 도자기가 무거웠나 보다. 유골함에 담겨 있던 스톤을 작은 지퍼백에 옮겨 담아 해당 물질의 기원이었던 고양이들의 이름을 적어 엄마에게 건넸다. 막상 그 순간이 왔을 때 순간 울컥 비슷한 거라도 할 줄 알았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았다.
텅 빈 유골함을 가지고 집에 들어오니 무언가 낯설고 허전하기는 하더라. 이미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걸 보낸 건데도 어쨌든 물리적인 부피와 무게를 가지고 존재했던 물체라 그런지 난 자리가 티는 났다. 하지만 그게 상실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고 다만 시원 섭섭함 정도였다. 죽은 돌들이 집에서 사라지고 나니까 왠지 집에 있는 고양이들이 그날따라 더 생기있어 보였다. 살아있는 것들로만 채워진 새로워진 공간인 것처럼. 기분 탓이란 걸 알면서도.
다음 날 엄마로부터 사진이 왔다. 스톤 두 뭉치는 해가 잘 드는 자리에 솟은 키가 큰 나무 아래에 나란히 묻혔고, 나무 앞에 있는 맨드라미 꽃길에는 유골이 뿌려졌다. 엄마가 사진은 참 못 찍었지만 그래도 그곳이 예쁜 공간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곳에 마침 맑고 쾌청한 가을 날씨가 더해져 만수와 하이바, 그리고 엄지가 드디어 이제는 정말로 편안해 보였다. 어쩌면 셋의 영혼이 정말로 저 자리에 꼭 머물게 된 것 같았다. 괜한 의미 부여라는 둥, 죽으면 그냥 다 끝이라는 둥, 지푸라기 잡고 자기 위로하는 거라는 둥 나 사실 T발 C인가 했었지만, 엄마가 발로 찍은 사진을 보고는 그제서야 심장 한 귀퉁이가 따끔따끔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