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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귀걸이

20221219


며칠 전, 저소득층을 위해 무료 진료를 봐준다는 어느 병원에 봉사활동을 다니는 후배의 사정을 듣고 옷장을 뒤졌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의료 봉사 외에도 여러가지 지원을 해 주는 곳이었는데, 살을 에는 이런 날씨에도 얇은 여름 바지를 입고서 겨울 외투를 얻으러 오는 노숙자들이 있다고 했다. 그분들을 위해 후배가 나서서 겨울옷을 기부받고 있었다.



물욕이 많은 탓에 뭐가 부족하기는커녕 뭐든 너무 과해서 문제인 나는, 나 자신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 한편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기에 온 집안 구석구석 빈틈없이 이것저것 뭐가 참 많기도 많다. 내가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정서적 결핍을 물질적으로 끊임없이 채우려는 목적이 숨어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것이 엄연한 정신 질환이라는 걸 최근 몇 년 사이에 늦게나마 깨닫게 됐고, 여전히 나는 긴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후배의 요청을 듣고나니 나의 이런 정신병조차 사치 같았다. 작년에 벼룩 계정에 올리려고 뒀던 옷 중 그 병원에서 수요가 있을법한 남성용 패딩(나는 옷을 살 때 성별을 가리지 않고 취향에 맞으면 구매하는 편이다.) 두 개를 골라, 고양이 털을 돌돌이로 열심히 떼고서 택배 포장을 해 두었다.



아. 그 벼룩 계정. ‘저장 강박증’ 환자의 셀프 치료 목적으로 시작했던 그 계정. 초반 업로드 이후로는 판매 글을 올리지 않아 왜 더 진행하지 않느냐고 물어봐 준 친구들이 몇 있었다. 사실은 핑계가 많다. 나도 부지런히 물건을 빼서 조금이라도 이 숨 막히는 살림을 줄이고 싶지만, 그 일이 아니더라도 나의 하루는 너무 짧다. 옷 한 장을 올리려 해도 세탁 과정을 거쳐야 하거나, 구김이라도 펴고 고양이 털을 떼는 과정은 필수, 최대한 실물과 가깝게 나오도록 촬영해야 하고, 중고 물품 특성상 조금의 하자나 사용감이 보이는 부분을 캐치해 글을 작성하는 시간까지 필요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해서 올려도, 마이너한 내 취향 탓에 수요가 부족하다. 이게 아닌데.



짐을 줄이고 싶지만 차마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이런 물건들이, 꼭 벼룩으로만 소비되길 원한 건 아니었다. 벼룩 계정을 만든 건 사실은 차선이었고, 우선적으로는 세컨핸드 제품을 판매하는 곳에 꾸준히 기부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간 곳이 [아름다운 가게]. 처음 갔을 때 100리터 정도 되는 큰 봉투에 꽉꽉 채워 두 봉지를 가져갔었다. ‘살 빼면 입어야지‘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 두고 한 번도 입지 못한 옷 중에는 택도 안 뗀 것들도 더러 있었다. 리셀에서 표현하는 ’미사용 새 제품‘이나 마찬가지였던 깨끗한 것만 골라서 가져간 것들이었음에도, 내가 기부한 것 중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정도만이 접수가 가능했다. 기부라고 해서 다 받는 것은 아니더라. 해당 지점의 자원봉사자가 꼼꼼히 검수 후, 재판매가 어렵다고 판단되는 물건은 기부자에게 반환된다. 반환의 기준은 품목마다 다르지만 사용감이 많아 너무 낡은 경우가 대부분. 그래서 내가 가져간 건 다 새 제품에 가까운데 왜 선별되지 않았느냐 여쭈었더니,


“디자인이 난해해서 아마 수요가 없을 거예요...”


기부가 확정 된 옷들을 보니 대체로 평범한 디자인의 옷들이었고, 팽 당한 옷들은 알록달록하고 치렁치렁하거나 주렁주렁하거나 번쩍번쩍한 뭐 대충 그런 계열의 옷들이었다. 오케이. 기준이 그러하다 하시니 일단 납득.



기부영수증을 받고 한 보따리를 도로 가지고 나오면서, 조금은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기부도 마음대로 못하는구나 싶어서. 어디 홍대 빈티지샵 같은 곳에서 팔면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잘 팔릴 옷들인데. 그래서 결국 ’빈티지은‘이라는 계정을 판 거였다. 계정에서도 잘 안 나간다 싶으면 그 차선의 차선이 또 있기야 하지. 내 병보다 지구의 병이 우선이므로, 환경을 고려해서 리폼을 통해 리사이클하는 방법도 있겠다. 물론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그래서 병원으로 지원품을 받으러 오신다는 노숙자들에게 보낼 그 패딩도, 후배에게 물어보고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알록달록한 우주배경스러운 원단이고, 하나는 반무광 인조가죽 재질인 오버사이즈 패딩. 기부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취향을 가진 나는, 그 때의 [아름다운 가게]사건 트라우마(?)로 인해 이런 일이 조심스러워진 거다. 물론 글을 읽는 너님들은, 받게 되실분의 입장에서는 추워 죽겠는데 디자인이고 뭐고 일단 따뜻하고 볼 일이니 굳이 취향 타령을 할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치만 그들도 사람인데, 기왕이면 사이즈도 맞고 자기 스타일인 옷으로 골라가시면 좋잖아.



한 번은, 오래전 빈티지샵에서 멋들어지게 빛바랜 비주얼에 한눈에 반해 구매해 몇 년을 잘 입은 내 티셔츠를, 전남친이 의류 수거함에 내다 버린 적이 있었다. 나이가 많았던 남친 눈에는 그게 정말 낡아빠진 옷인줄로만 보였던 거다. 촌놈 새끼. 나는 내가 아끼는 옷이 버려진 줄도 모르고 일하고 있다가, 가게 앞을 지나는 한 고물 아저씨의 리어카에 어디서 많이 본 옷이 있길래, '아저씨 그거 어디서 났어요?' 하고 물어 커피 한 잔과 맞바꿔 다시 찾아왔던 썰.


그렇게 그 아저씨와 친분이 시작됐었는데, 그 분은 다른 고물 아저씨들과는 다르게 아주 멋쟁이셨다. 이 동네에는 폐지나 고철, 공병 등 고물을 수거하며 리어카를 끌고 다니시는 분들이 꽤 있다. 건물주 3부작으로 썼던 글에서처럼 재미 삼아 용돈벌이로 그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실제로 어려운 분들이고, 그 중에서도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분도 계신다. 비록 새 옷을 사 입을 형편은 아니었어도, 그분은 의류 수거함에서마저도 좋은 옷을 볼 줄 아는 분이셨고, 심지어는 스타일링도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다. 기초생활수급비와 매일 고물을 해서 판 돈 몇 푼으로 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며 허름한 판잣집에 살았지만, 그 와중에도 천 원이든 이천 원이든 몇 달을 따로 차곡차곡 모아, 시장 금은방에서 봐 둔 작은 귀걸이를 마침내 사고서는, 육십이 다 되어 드디어 귀를 뚫었다며 자랑하려 '헌옷'을 쫙 빼입고 우리 가게에 들르던 분이었다. 어떤 사연으로 삶이 힘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멋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걸 잊지 않고 산다는 게 그 사람을 더 멋져 보이게 했다. 모르긴 몰라도 한때는 여자도 여럿 만나고 로컬에서 좀 날렸던 간지남이었을걸.



그 아저씨가 생각나서, 내가 보낼 옷을 챙겨가실 분은 누굴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무래도 보통 멋쟁이가 아닐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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