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엿듣쟁이

20221214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게도 너무 지나치게 연속적이란 말이지.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그랬다기엔 또 딱히 그럴만한 이유랄게 있을 것도 없고.



시간대는 대충 비슷하긴 한데 범위가 넓고 딱 떨어지는 시간대가 아니라서, 의식하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도 노력은 해 봤다. 하지만 매번 들켰다. 들켰다고 하기도 뭐해. 내가 내 가게에서 몰래 할 게 뭐가 있겠어. 물론 누가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 안 그랬겠지만.



그래, 몰래 오면, 지가 몰래 오는 거겠지. 근데 손님이 편의점에 뭐 훔치러 오는 것도 아닌데 몰래 올 이유가 뭐가 있겠냐고. 일단 나쁜 애가 아닌 건 나도 안다. 항상 예의도 바르고, 종량제도 주기적으로 사 가는 거 보면 요즘 애들처럼 개념이 없는 것도 아니지. 이 동네 녀석치고는 조신하고 순한 편이니까 악의가 있진 않을 거야.



근데 도대체 왜 그렇게 매번 인기척 하나 없이 들어와서는 사람을 놀래키냔 말이야. 귀신이야? 현관 문짝에 종도 양쪽으로 달려있고, 센서로 작동되는 차임벨도 켜져 있는데 어쩌면 꼭 쟤가 올 때마다 소리가 안 나냐고. 그러니 내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자꾸 그러는 거 아니겠어.



한두 번 그런거면은 내가 이렇게 글 소재로 쓰지도 않어. 오히려 안 그런 날이 손에 꼽지. 왠지 그런 날은 내가 이긴 것 같고. 야 내가 씨 오죽 수치스러우면 그러겠냐. 아니, 성격이라도 좀 유쾌해 보이면 나도 그냥 대놓고 창피해하면서 같이 웃어넘기고 싹 잊을텐데, 낯도 많이 가릴 것 같고 별로 재미없는 성격일 것 같단 말이지. (그런 것 치고는 목 쪽에 타투가 있어서 오히려 그게 더 의외였을 정도다.) 워낙에 말도 조용히 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들어오고 나갈 때 문도 조심히 살살 여닫아서 그런거려나. 그게 습관이라면 좋은 습관이긴 하다만. 그렇게 매사 고양이 마냥 인기척 없이 다니면 나 말고도 놀래는 사람이 주변에 많을텐데. 그 정도로 타인을 배려하는 성향이면 그런 점까지 캐치해서 어느 정도는 일부러라도 소리 내면서 움직이지 않나? 나는 좀 그런 편이라.



하여간 이게 하도 계속되니까 쟤도 이젠 내가 원래 주위 사람 1도 신경 안 쓰는 그런 사람인 줄 알 것 같네. 차라리 그게 나으려나. 왜 부끄러움은 나 혼자만의 몫인가. 다 듣고 봐놓고선 모른 척하는 거 졸라 킹받음. 물론 모른 척 해 주는 거겠지만. 너무 천연덕스러워서 정말 못 들었는 줄 알고 귀에 이어폰이라도 끼워져 있는지 나갈 때 스을쩍 확인까지 했다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 보고 쌉소름.



너무 여러 번의 일이라 왠지 갈수록 나도 항마력이 생기는 것 같아서 그게 더 싫다. 예전만큼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아짐. 아무 일도 없던 척하는 게 이젠 익숙해질 지경. 차라리 이렇게 뻔뻔하게 밀고 나갈까. 정말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것 마냥.



다른 손님하고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한번. 계산하고 나가는 손님이 문을 연 동안 다른 손님이 동시에 들어왔던 건데, 나는 그냥 계산 끝나신 분이 나가는 소리인줄로만 알고서(발주 화면 띄워져 있을 때엔 cctv를 실시간으로 볼 수 없거든) 당연히 나갔다고 생각하고 나밖에 없으니 흥얼거렸지. 음. 흥얼거렸다기보다는 목청을 높이긴 했어. 나는 흥부자 ENFP니까. 노래가 신나는 걸 어떡해. 마침 메인 파트가 나오고 있었고, 손님이 나갔으니 신나게 열창했지. 다행인 건 그때 그렇게 들어왔던 손님이, 전에도 소개했던 그 ‘비보이 청년’이었고, 걔는 나보다 더 흥부자인 애라 아무래도 덜 창피했었다. 지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계산대 앞에서도 갑자기 둠칫 두둠칫 스텝 밟는 애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더라고. 내 목소린 못 들은 것 같았다. 물론 어쩌면 한 노래와 다음 노래 사이의 빈 사운드 동안 내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친구는 소리가 밖으로 샐 만큼 큰 소리로 노래를 듣는 편이고, 마침 그런 구간이었을 확률이 적긴 하잖아. 그래서 서로 신경 쓸 것 없이 어물쩍 넘어갔지.



짜증나게 매번 꼭 그 엿듣쟁이에게만 딱 걸리는 거다. 나는 왜 꼭 걔가 올 때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까. 아니지, 걔는 왜 하필이면 꼭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만 뭘 사러 오는 걸까. 하여간 악연이야, 악연.


발주를 넣으면서 큰 소리로 틀어둔 노래를 듣는다는 것. 일하기 싫은 만큼 나오는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른다. 여기서 ‘열심히’란, 목소리를 예쁘게 가다듬고 성의를 들여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최대한 일이 즐거울 수 있도록 갖은 주접을 떤다는 말임. “슈비두밥빠”라던가 “워우워후워허”라던가 또는 “호우!!!” 하는 추임새도 당연히 필수. 원래 그런 게 진정한 [노동요] 아니겠어. 랩이 나오면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처럼 허세 넘치는 손동작도 추가된다. 힙합은 스웩이니까. 피쓰.



어제는 하필이면 또 약빤 가사가 나오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요즘 좋아하는 비비의 ‘사장님 도박은 재미로 하셔야 합니다’. 제목부터 찐광기 아니냐.


“나는 여기를 걸고, 쟤는 저년을 걸고”가 나오는 도입부였고, 앞뒤 가사로는 ‘pussy’와 ‘bitch’가 난무한다. 이런 류의 비비 노래는 미친년처럼 불러야 하니까, 일하기 싫었던 만큼 컨셉에 충실하게 소화해냈다. 나의 곡 해석력에 만족하는 순간, 계산대 앞으로 그놈이 온 거다.


이 새낀 또 언제 들어온 거야. 이렇게 여러 개 고르는 동안 어떻게 계속 모를 수가 있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자 쌩쇼를 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있던 거지? 어디부터 듣고 있던 거지!? 시발놈. 속으로 얼마나 쳐 웃고 있었을까.



“계산 해 드릴까요?”



“네, 봉투 주세요.”



삑-


삑-


...



“아, 종량제 50리터로 다섯 장 주세요.”



항상 20리터만 쓰던 놈이 갑자기 대용량 종량제를 다섯 장이나 사간다...?


이거 이거, 분명 이사 각인데. 드디어 이 무한한 수치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막걸리 언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