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알록달록 Mar 01. 2024

Fighter

20240301

중학교 때의 나는 비디오 가게와 레코드 가게 죽순이였다. 그땐 어려서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비디오 가게와 그 레코드 가게의 사장님은 보통 오덕들이 아니었다. 정자동에서 파장동 가는 방향의 버스정류장 앞 비디오 가게엔 정말이지 없는 영화가 없었다. 국내에 당시엔 DVD로 정식 출시되지 않았던 미드 시리즈도 그곳에는 있었는데, 사장님이 직접 어둠의 경로로 불법 다운 받아서 CD에 구운 거였다. 표지도 손글씨였다. 그런 작품들은 양심상 돈을 받진 않고 적립 포인트 같은 걸로 대여해 줬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P2P 사이트에 올라온 동영상 같은 거라 화질도 자막도 엉성했을 테지만 그땐 머리가 작았으니 그런 줄도 모르고 봤었겠지.

비디오 가게 사장님은 중학생 꼬맹이가 그 나이대에 맞지 않는 장르의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영화들을 빌려 가는 게 꽤 인상적이셨었나 보다. 자주 다니던 어느 날엔 보고 싶은 영화를 골랐는데 그게 19세 미만 관람 불가였다. 야한 영화는 아니었고 일부 폭력적이고 퇴폐적인 장면들이 있어서 R등급을 받았을 그런 영화였는데, 그러면 안되지만 나를 한 번 훑어 보시고 내가 빌려본 내역(말하자면, 나의 필모 같은 것)들을 한 번 또 훑으시더니 군말 없이 빌려 주셨었다. 아, 비밀이라고는 하셨다. 오덕은 오덕을 알아 보는 법. 우리는 서로를 리스펙트 한 거다.


시내의 작은 레코드 가게 사장님은 신보를 줄줄이 외우고 계셨다. '뭐가 새로 들어왔다' 정도의 장사치가 아니라 '이걸 좋아한다면 저것도 좋아할 거야' 하며 취향을 말 그대로 저격하는 양반이었다. 소박한 매장 탓에 입고되지 않은 음반을 물을 때도 있었는데, 것 좀 구해달라 하면 다 구해다 주셨었다. 덕분에 2000년대 초의 음반을 많이 가지고 있다. 아마 받은 용돈은 모조리 그 집에 갖다 바친 것 같다. 돈을 벌 수 없던 나이였기에 대학생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 1순위는 그 레코드 가게의 알바생이 되는 거였다. 당시의 알바 오빠는 역시 그 사장님이 뽑아서였는지 꽤 내 이상형이었다. 오덕은 오덕을 알아 보는 법. 락키드였던 그 오빠, 지금 뭐 하고 살까.

엄마가 집을 떠난 후로 하루종일 영화나 MTV 보고 듣는 낙 뿐이던 나는 2002년 발매 당일 학교를 마치자 마자 혼자서 버스를 타고 레코드 가게에 갔다. 바로 그 매장에서 구매했었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2집 앨범 속 4번 트랙.



뭣 몰랐을 그 때엔 그저 '멋지다!' 정도의 음악과 뮤직비디오였는데 오늘 오랫만에 우연히 다시 들으니까 존나 내 서른여덟 살 주제가네. 2024년 테마송은 이걸로 정한다. 나를 괴롭혀 온 존재들은 나를 더 강하게 했고, 더 열심히 일하게 했으며, 더 현명해지도록 만들었다. 나는 뭐든 빨리 배우게 됐고, 뭐 나쁘지 않을만큼 꽤 뻔뻔해지기도 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그것들이다. 졸라 땡큐다, 아주 고호맙다.


그 19금 영화가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서 나도 궁금함. 그리고 대학교 1학년의 나는 오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원과 영상의 역사를 바꾸면서, 추억의 레코드 가게도 비디오 가게도 내가 고등학생일 때 이미 문을 닫았다. 꼭 그래서는 아니었지만 또 살다보니 어쩌다가 카페에서 음악을 틀고 영화관 영사실에서 영화 트는 일을 했다.


작가의 이전글 빈 문서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