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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Mar 07. 2024

미친년 중에 가장 제정신인 미친년

20240307


학지사 이상심리학 시리즈 [저장장애]편


내 버릇이 단순히 성격과 습관을 넘어 '질병'이라고 인지한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나마도 긍정적인 부분은, 저장강박을 가진 거의 대부분의 환자들이 본인의 그런 특징을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거다. 심리 치료의 시작은 증상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것부터인데.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뼈를 때리는 책을 직접 골라 샀고, 존나게 후드려 맞으면서 페이지 위로 흐르는 피를 닦아가며 읽고 있다. 매체에 가끔씩 나오는 다른 환자들을 보며 '에이,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라고 생각했지만 책에서 심각한 수준이라 판단하는 진단 항목의 모든 사항에 해당되었다. 심지어 이 몹쓸 병은 강박 스펙트럼 내 혼합성향인 도박 중독과 성도착장애와도 사이좋게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의 강박도 충동도, 아주 좆창났다는 말이다.

또 많은 저장강박증 환자들이 우울증 증상을 동반하는데, 우울증이 (무기력으로인한)저장장애를 낳기 보다는 만성적 저장장애(강박적 수집 행동)가 길어질 경우 우울증은 거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본다. 내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나를 소유하는 지경이 되면 통제권을 상실하고 무력감에 압도되어 자존감을 잃기 쉽기 때문에. 최근에 내가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우울감이 바로 이 단계다. 나아가 우울증의 무기력함에서 비롯된 저장 증상(버리지 못하는 행동)도 역시 해당되니까, 이 분야로는 정신병력 만렙을 찍었다.

수집과 저장 행동은 회피적 성향에서 비롯된다. 실수와 상실에 대한 불안과 공포심은 강박적인 저장 행동으로 이어지고 이에 일시적 안정감을 느끼지만, 직면했어야 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니 문제는 또 다시 발생하고, 또 회피적 저장을 하고,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간다.

줘터지면서 끝까지 읽겠다. 혼자 힘으로 도저히 어렵다면 (사실 이 병은 특히나 매우 그러하다) 도움도 받겠다. 아직은 내 상태를 설명하기도 수치스러워 최대한 멀쩡한 척 지내지만.

하여간 비전문가가 적당한 깊이의 이해를 필요로 할 때 괜찮은 시리즈인 것 같다. 심리학 중에서도 이상심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입문서로 좋다. 저장장애 말고 다른 문제도 너무나 많은 나와, 또 다른 끝내주는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내 주변에 대한 추가 이해를 위해서, 다 읽으면 시리즈 내 다른 편도 하나하나 도장깨기 할 예정. 자기가 미쳤다는 걸 아는 미친 년이야말로 얼마나 제정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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