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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Mar 13. 2024

딸기 먹는 법

20240313



어려서부터 과일은 별로 안 좋아해도 딸기는 좋아했었다. 소매업자가 되고나서는 원가 이하로 먹을 수 있게 됐는데, 그나마도 유통기한이 지나 상품 가치가 떨어진 거 정도나 먹는 수준이다. 원가보다도 싸게 먹을 수 있는 이유는 본사의 폐기 지원 시스템 덕이다. 팔지 못한 과일은 기본적으로 원가의 50%를 지원해 준다. 과일 전문점이 아닌 포지션에서는 잘 나가지도 않는 과일을 진열해 놓고 팔기가 꽤 부담스럽기 때문인데, 이런 지원을 해줌으로써 발주를 권장하는 거다. 결국엔 못 판다고 해도 원가의 반값만 손해보는 거고, 그나마도 내 입으로 들어가면 그리 손해라고 볼 수도 없으니 종종 계절 과일을 발주하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 폐기 지원에 조건이 붙었다. 판매 기록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못 팔고 남은 재고에 대해 지원되며, 지원율도 낮아졌다. 반드시 하나라도 판매해야 유통기한이 지난 상품이라도 싸게 먹을 수 있는 거다. 물론 지원을 포기하고 그냥 원가에 먹어도 시중보다야 싸게 먹는 거지만 편의점에 유통되는 소매의 원가는 도매 원가에 비하면 훨씬 비싸고, 과일은 워낙에 단가가 높다. 특히나 올해 딸기값은 500g에 만 원이 넘었다. 작년 여름에 더 가물어서 다른 해보다 유독 올 겨울에 나온 딸기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그러던 중 봄이 왔고 딸기가 끝물이 되니 이제 겨우 딸기 값이 좀 내렸다. 500g 한 팩이 9천5백 원. 이 정도면 최근 옆에 새로 생긴 과일 카페에서 파는 더 비싼 품종의 딸기보다야 훨씬 저렴하니까 경쟁력이 있을 거라 판단하고 오랫동안 망설이던 발주를 넣었다. 유통기한은 단 3일. 그 안에 하나도 팔지 못하면 소비기한이 지나 물러터진 딸기라도 원가에 먹어야 한다.


화이트데이 행사 때문에 본사 담당자가 방문했다. 원래는 목요일 방문인데, 하필 오늘 지역부 팀원 점심 회식을 이 동네에서 하게 되어 팀장님이 둘러 보시기 전에 점검하러 왔댄다. 팀장님한테 잘 보여야하는 말단 직원이라서 뭐 하나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안되니까, 굳이 없어도 되는 홍보물을 갑자기 여기저기 붙인다. 내 입장에서는 사실 밉보여도 크게 손해될 건 없기도 하고, 몇 해 전 본사가 근거리 매장 오픈을 허락 받으러 나를 찾아 왔을 때 거한 전이 있어서(기준 거리 내에 같은 브랜드의 편의점을 오픈할 시, 고객 동선이 겹치는 지점의 점주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오픈할 수 있다) 이미 밉보인지 오래라 그러던가 말던가 상관없었다. 허접한 홍보물을 과하게 붙여대는건 내 방식이 아니지만 본인의 원활한 회사 생활을 위해 내 매장임에도 댁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그대로 뒀다. 팀장이 와 봤자 잠깐이니 가고나면 나중에 떼지 뭐.


그런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왔지만 방문한 김에 최근 우리 매장 앞으로 올라온 클레임 건을 전해 주더라.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며칠 전 동네 당구장에서 종량제를 사러 와서는 카드를 내밀길래 '종량제는 우리도 남는 상품이 아니라서 카드 결제 하시면 카드 수수료 때문에 오히려 파는 게 손해다. 그러니 다음 번엔 다른 상품을 사러 오시는 김에 종량제를 같이 결제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설명 했었다. 보통의 손님도 아니고 한 동네에서 장사하는 사이니까 그 정도 상도의는 지켜달라는 호소였다. 최대한 정중하게 말 했는데도 불쾌한 티를 내며 다른 데서 사겠다고 하길래 그러시라 했다. 팔면서 손해 볼 거면 나도 팔 이유가 없으니까. 근데 이 시발년이 내가 카드 결제를 "거부"했다고 클레임을 올린 거다. 담당자는 내게 해명을 요구했다.


그 후 팀장이란 놈이 왔다. 마스크를 쓰고 있기도 했고 1년에 많아야 한두 번 본 사이라 그냥 손님인 줄 알았다. 클레임 건으로 안 그래도 기분이 상한 와중에, 자기를 어째서 못 알아 보냐는 눈빛과 니가 뭔데 너는 내게 조아리지 않느냐는 그 태도에 빈정이 상했다. 님이 내 가게에 납셨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대충 인사하고서 근무중이냐는 말에 퇴근중이라고 대답했다. 별로 말 섞고 싶지 않아서. 다행히 자기도 식사 시간이 임박해서 바로 갈 거라고 했다. 그러시라고 했다.


딱 오늘까지였다. 오전 손님 중 한 분이 드디어 딸기를 샀다. 미끼를 물어분 것이여. 남은 재고는 오늘 날짜로 밤 12시까지 판매에 전혀 지장이 없지만 하루라도 조금 더 싱싱한 딸기를 먹고 싶어서 일찍이 폐기를 찍고 퇴근길에 가져왔다. 어차피 소심하게 두 팩만 시켰으니 남은 한 팩을 챙긴 거다. 편의점 점주가 좆같은 과일을 먹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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