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중*
수희 : 왜 이렇게 눈만 시뻘겋게 칠하고 다녀?
금자 : 친절해 보일까봐.
크으- 무릎을 탁.
쎄보이고 싶었다. 의도적으로 먼저 누구를 겁주고 쎈 척을 하고 싶단게 아니라, 그냥 아무도 날 안 건드렸으면 싶었다. 태생부터 갖고 태어나 어쩔 수 없는 둥글고 희멀건한 얼굴에 임팩트 하나 없이 밋밋한 조합의 눈코입. 사기 잘 당하게 생긴 이 호락호락한 인상이 싫었다. 그런 내 얼굴이 싫다기 보다(그랬으면 성형을 했다) 이렇게 생겼다는 이유로 그렇게 보여지는게 싫었다.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믿기 때문에 이렇게 생긴 나에게 정말 그렇게 대했다.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중요한 순간에 사람 쉽게 보고 무시하는 건 물론이고, 어딜가도 있는 길거리 도인들이 그렇게나 붙잡고 말을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두리번거리며 타겟을 찾는 것 같아 눈을 피하면 백이면 백 나에게 온다. "쟤다!"싶은 그들만의 기준이 있나본데, 그게 바로 접니다.
영드 [스킨스]를 영접했을 때 내가 추구하는 쎈캐가 '퇴폐미'라는 걸 알게 됐고, 막연한 동경심이 생겼다. 단순히 '노는 애'의 까진 느낌과는 달랐다. 자유분방한 패션과, 무기력하면서도 쿨한 에티튜드, 그들이 뿜는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 무심코 거울을 봤는데 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하.
고3 수능이 끝나자 마자 버킷리스트 중 가장 먼저 한 것은 피어싱이었다. 일부러 입학 전에 어떠한 이미지를 '준비'하려는 목적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후에 동기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때 했던 눈썹 피어싱 덕에 신입생 OT때 뭔가 다가가기 어려운 포스가 느껴지긴 했다고 하더라. 오호라!
생에 첫 피어싱은 관리 부실과 불편함으로 1년도 못채우고 얼굴에서 제거됐다. 역시 쿨한 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후에는 탈색+염색을 하거나, 찐으로 쎈캐였던 친구(항상 스모키한 화장에 스쿠터를 타고 다니고, 술 마시다 시비가 붙어 경찰서도 들락거렸던 녀석. 지금은 참한 남자에게 시집가서 애 낳고 조신하게 잘 살고 있다)와 함께 그 때만 해도 지금처럼 흔하진 않았던 타투에 입문을 했더랬다.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 보겠다고.. 그래봤자 첫 사회 생활을 농진청(수원) 공무원들의 말단 계약직으로 보낸 만큼, 외적으로는 그럭저럭 단정한 편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 가게를 시작하면서는 잊고 있던 그 마음이 좀 더 커졌다. '편순이'라는 직업이 안그래도 만만한데 세상 천직인 것 마냥 졸라 만만하게 생긴 애가 마침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어디서 '진상 면제권'이라도 받은 듯, 이런 애한테는 그래도 된다는 듯이 우습게 봤다.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더 함부로 대한다. 이 전 글에서 '스타일 구겨진다'는 이유로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 했지만, 사실은 겸사겸사. 최근 출시된 [원소주]의 프로모션 짤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하다 못해 박재범 마저도 편의점 유니폼빨을 받으면 갑자기 찌질이찐따가 된다. 무시무시한 파워를 가진 마법의 조끼.
하여간 나는 꼭 쎄보여야만 했다. 마침 가게 근처에 타투샵이 생겼고, 타투는 늘어갔다. 알이 굵은 무거운 악세사리를 주렁주렁 하고, 피어싱도 다시 했다.
짠! 완성✨
물론 단지 쎄보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취향도 아닌데 굳이 억지로 이렇게 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하다보니 무의식에 취향으로 남게 됐겠지. 쎈캐st이 멋져보여서 나도 쎄보이고 싶던 건지, 쎄보이고 싶다보니 쎈캐st을 따라하고 싶어진 건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중요한 건 겉모습이 변화하니 내면도 변화되더라는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있지도 않던 어떤 힘이 갑자기 생겼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사실은 어쩌면 원래도 충분히 쎘는데 지금 껏 내가 알지 못했던 것 같다고 할까. 겉과 속의 간극이 좁혀져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인, 뭐 그런 느낌. 이제야 내 옷을 입은 것 같은.
언젠가 어떤 점쟁이가 그랬다. 본인은 기가 약한 줄 알지만, 너샛기 절대 약한 기가 아니라고. 점쟁이 말은 믿거나 말거나긴 해도 그 말이 내심 되게 좋았다. 단순히 남들이 봤을 때 쎄보이고 싶은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내가 실제로도 강한 사람이었으면 했으니까.
나이를 먹어 가면서 경험치가 늘고 점점 내구성이 강해진 것도 분명 있겠지만, 뒤돌아보니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강한 사람이었더라고. 이걸 깨닫기 전 까지는 나약했던게 아니라 '기를 못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단정짓고는 그 틀에 갇혀 내가 나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 + 나이스가이 콤플렉스.
기를 살려 준 주변인도 큰 도움이 됐다.
전남친은 항상 나의 정신력을 칭찬했었다. 또래들에 비해 정신력이 강하다며, 나보다도 한참 어른인 사람(ㅋㅋㅋ)이 인정해 주니 일단 믿어 보기로 했고, 나 스스로도 그 점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나는 정신 승리에 굉장한 소질이 있다 => 정신력 갑).
맹히씨도 의견을 보탰다. 누가 딸에 대해서 물어보면 늘 이렇게 얘기한다고.
"우리 딸 착하지. 건들지만 않으면. 호호"
"걔는 건들면 물어. 호호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엄마 맞냐곸ㅋㅋㅋㅋㅋ
오늘도 나는 마법의 조끼를 입는 대신, 혹시라도 "친절해 보일까봐"서 레드제플린 락밴드 티셔츠를 입고 a.k.a.미친년 머리를 한 채로 바이레도의 데로스산토스(약쟁이에게 날 것 같은 매캐-한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고선 이 자리에 서있다. 그래. 또라이 스탯을 패시브로 장착.
그 손님이 했던 말처럼 나는, 경우만 지켜주면 사실은 엄청 친절한 사람이다. 그치만 친절해 보이기는 싫어. 맹히씨 말처럼 건들면 물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젠 건드린 년놈에게 금자씨의 대사를 날려줘야지.
"너나 잘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