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노잼글 모음집

20220911

part 1. 아무도 안 궁금해 할 현재 독서 스코어

책을 많이 읽겠다고 다짐하며 산 책이 그 사이 벌써 스물한권이다. 쇼핑 줄인다더니 염병하고 책을 쇼핑하고 있음. 장바구니에도 아직 더 사야할 게 늘 남아 있다. [무소유]를 읽지 못하는 물욕의 아이콘. 그렇게 지른 것 중 완독한 책은 겨우 1권. 지금까지 사 놓은 책은 올해 안에 읽는게 목표였지만 지금 속도로 봐서는 택도 없다. 반이라도 읽으면 다행. 나는 글을 읽는 게 느리니 어차피 읽다가 그 흐름이 끊기게 되어있어 알바녀석(책벌레, 안경잽이)이 알려준 '병렬 독서'의 방법으로 읽고 있다. 현재 읽고 있는 책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이라는 말. 돌아가며 읽다보니 가진 책의 반 정도는 책갈피가 꽂혀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아는 게 너무 없어 추천받은 책이 대부분이고, 내가 고른 책은 일부. 물론 추천 목록 안에서도 내가 추리긴 했지만. 그 중 에세이가 반이고 나머지는 교양심리/자연과학/단편소설 등으로, 다양하게 접하고 싶었다. 나처럼 비전문적인 다른 사람들의 글도 궁금해서 개인이 펴낸 인디북(?)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고, 필진에 친구 녀석의 이름이 들어간 어린이도서도 의리로 사둠. 그리고 이런 류는 정말 안 좋아 하지만, 실질적 도움을 위해 창작과 관련한 '자기계발서'도 하나. 아무튼 고른 기준은 내가 흡수하고 싶은 것에 대한 것들이다. 문제는 인풋과 아웃풋의 속도가 안 맞아서 너무 적게 읽고 그에 비해 너무 막 써제낀다는 것. 난독증에게 글읽기 훈련은 분명 효과가 있긴 하지만 그 성과가 생각보다 아주 더디다. 마음은 앞서는데 읽는게 워낙 느리니 답답하기만. 나도 좀 차분히 이것 저것 다양하게 많이 읽고 >> 되새기며 생각한 후 >> 정제된 글을 써 보고 싶다.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ㅠㅠ



에세이는 정말 쓰는 사람에 따라 개성이 천차만별이었다. 아직 몇 권 접하지도 않았는데도 이정도면, 세상엔 도대체 얼마나 방대한 다양성이 존재하는 걸까. 구입한 책들은 일부러 서로 달라 보이는 스타일로 고른 의식적 선택의 결과물이긴 하다. 다양하게 접해야 글 쓰는데에 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추천 받은 한 책은, 너무 따듯하고 포근한 정서라 읽는 내내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니. 그 긍정적인 마인드가 오히려 좀 부담스러웠고, 그렇게 생각한 나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분명 일상적인 이야기인데도 뜬 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울게 없는 내용임에도 속도가 안 난다.


하지만 오히려 직감만으로 골라 후기가 보장되지 않은 책의 갬성은 나와 맞았다. 재밌게 읽은 에세이는 하나같이 어딘가 결핍이 있는 작가가 쓴 다소 어두운 내용들의 책. 이들은 항상 내면의 뭔지도 모를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공감 포인트가 많아서인지 쭉쭉 읽힌다. 생각해보니 나는 노래를 들을 때에도 장르와는 별개로 장조(밝은 음계) 구성의 곡 보다는 단조(우울한 느낌의 곡조)의 멜로디를 가진 노래들을 좋아했다. 참 한결같은 취향.


현생에서도 사랑 듬뿍 받고 자란 너무 해맑고 밝은 친구들은 왠지 친해지기가 어렵더라니. 상대에게 내가 내 때를 태울 것만 같잖아. 그러니 반대로 그들도 나의 글에 피차 공감할 수 없다면, 차라리 영원히 읽지 않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로부터 때 묻지 말고 그렇게 밝고 맑게 남아 있어주렴.




part 2. 나만 안 궁금한 번따남



며칠 전 새벽에 가게 앞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술에 좀 취한 걸로 보이는 남자 둘이 걸어오면서 파이팅 넘치게 서로 으쌰으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보며 수군대더니 내 쪽으로 한 놈이 오길래, 왠지 괜히 또 시비를 털 것같아 방어 태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의 한 손에는 쓰레기통, 다른 한 손에는 쇠집게가 있었다. 드루와 이새끼야.



"저기요."



"뭐요." (존나 경계)



"저 앞에 가고 있는 제 친구가요, 맘에 든다고, 쓰레기 이렇게 줏으시고, 보기 좋다고, "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맘에 든다고 해서요, 그래서 제가, ~"



"뭔 소리에요, 그게? 뭐가 맘에 들어요? 쓰레기? 알아 듣게 얘기하던가."



취해서 인지, 아니면 상황 자체가 그래서 였는지 횡설수설했다. 하여간 반격을 준비하던 나도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마찬가지라 말이 막 나왔다. 경계가 안 풀려가지고.



"아 죄송해요. 제 친구가 그 쪽 번호 좀 대신 받아달라고 해서요. 저 놈이 숫기가 없어서 제가 도와줄라고 그런 거구요. 저 앞에 쟤 보이시죠? 노란 머리. 저 녀석이, ~"



"말씀 중에 죄송한데, 안 궁금한데요."



"아. 그러실 수 있죠, 근데 쟤가 오며가며 봤다는데 새벽에 이렇게 쓰레기도 줍고 하시는게 보기 좋았나 봐요, 일도 열심히 하시고 그래서, ~"



"아니, 제 말을 이해 못하신 것 같은데, 저 분 생각이 어떤지 안 궁금하다구요. 궁금하지 않은 걸 제가 왜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가시라고."



"아... 예, 예. 죄송합니다. 일 보세요."



내 성에 안찼던 게 아니다. 성에 차고 안차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저 앞에 뒷모습만 보이며 가는 저 친구란 놈의 앞모습이 일절 궁금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그 앞모습도 모르겠는 놈의 생각도 궁금할리가 없었고. 두놈 다 우리 가게에 종종 와 본 듯한 저런 말을 했지만, 나는 누군지 기억도 안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못되게 굴 일인가. 나 주제에. 당연히 거절은 하겠지만, 그래도 상대는 호의였으니 거절의 뜻이라 해도 조금은 더 예쁘게 말 해도 됐었을텐데. 대신 말한 친구놈은 또 무슨 죄라고. 꽤 무안을 준 것같아 지나고 나니 좀 미안해졌다.


나샛기 존나 꼬였구나 싶네.



내 얘기를 들은 친구가 그래도 불러서 얼굴도 한번 보고 번호도 일단 줘 보지 그랬느냐고 했다. 가볍게 만나보는게 뭐 어떠냐고. 친구와 친구의 신랑도 처음엔 그렇게 만났었고, 지금은 인생의 남자가 되었다고. 앞 일은 모르는 거라며.


근데 그건 너의 운이기도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의 가벼운 만남에 대해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 나도 까짓거 한번 그래보고 싶을 때도 있고, 그런 식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친구들의 재밌는 추억 썰이 부러울 때도 있다. 다만, 나는 그게 어려운 사람이다. 그러기엔 나는 의구심이 많은 것 같다. "번호 좀"이란 접근 방식부터가 나는 싫다. 초면이건 구면이건 친한 것도 아니면서 나에 대해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고작 쓰레기 줍고 고양이 밥주는 것 좀 봤다고 어떻게 마음에 품을 수가 있는 건지. 분명히 현실의 나는 본인이 생각하고 있던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그냥 '애님 맬구'하면 끝인 건가? 그게 뭔 시간낭비냐 이 말이야. 번호를 요구하는 것 부터가 나를 아니면 말아도 그만인 그런 가벼운 상대로 여긴 걸로 밖엔 해석이 안돼서, 솔직히 말하면 시도한 자체가 불쾌하다. 아마 요구한 당사자도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겠지 하는 생각과 직결된다. 그때 점쟁이가 나에게 '마음을 너무 안 연다'고 지적했던게 이런 걸 말한 건가보네. 시발.


존나 고지식. 씹선비. 꽉막캐.



그리고 사실 그걸 떠나서도, 친구를 시킨게 나는 참 별로더라. 그정도 용기도 없는 사람의 마음은 정말이지 전혀 궁금하지가 않다. 일단 나는 그런 '사소한 부탁'이라면 질색이잖아. 애도 아니고.



그리고 또 그런 것도 다 떠나서, 아직은 너무 이르다.




part 3. 째깐이



째깐이는 전남친이 목포 앞바다에서 구조해 온 고양이다. 너무 작아서 그랬는지 어미도 방치하고 낚시꾼들이 던져주는 생선도 형제들에게 밀려 다 뺏기더라고. 초겨울의 바닷바람이 사람이 견디기에도 날카로웠던 그런 날, 세워둔 오토바이 엔진에 기대 몸을 녹이며 혼자 울고 있더란다. 짠한 마음이 든 중년의 남성은 술김에 한 줌밖에 안 됐던 째깐한 털뭉치를 집으로 데려가 몇달을 먹이고 재워 조금 고양이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본인의 일 때문에 타지를 떠돌아야하는 변수가 생겨, 그 째깐한 털뭉치는 나에게로 오게 됐다. 아빠가 일 나가면 늘 혼자였던 째깐이는 친구들이 생겼으니 이제는 외롭지 않았고, 엄마인 나에게도 아빠에게 못지않은 사랑을 줬다.



째깐이가 즈그아빠 손에서 자란건 고작 서너달 정도 였을 것이다. 그후로는 나와, 우리집 고양이들과 함께 5년 정도 살고 있다. 고양이에게도 유년기의 기억은 참 중요하다고 느낀 게, 여기 오고는 1년에 몇 번 볼까말까 했던, 초년의 짧은 시간동안만 함께였던 아빠를 잊지 않고 늘 반겼다. 남친은 그런 째깐이에게 감동하며 애틋해 했다. 확실히 내가 대체할 수 없는 둘 사이의 어떤 것이 있었다. 외로운 두 영혼(남친은 평생을 외로운 사람이었지만 그 외로움이 너무나도 익숙해 본인이 외롭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이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되었던 듯하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째깐이에게 '엄마가 좋아 or 아빠가 좋아'란 세기의 난제를 꺼내며 질투를 하기도 했다.



(난 둘다 싫고, 엄마가 그나마 덜 싫다)



째깐이는 이제 그렇게 좋아하는 즈그아빠를 볼 수 없게 됐다. 제 의지도 아닌데. 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몇달 전 비슷한 시기에, 서로 헤어지면서 키우던 고양이 세마리의 양육권 문제로 힘들어 하던 언니가 있었다. 우리는 그나마도 분쟁은 없었다. 남친도 나도, 째깐이가 나에게 남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편안할 것이라는 거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엔 그동안 함께 지낸 다른 녀석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째깐이가 걱정이다. 목포집 시절, 외동으로 크다보니 혼자 잘 지내긴 했어도, 아빠 퇴근 때까지 긴 시간을 현관 앞에서 기다리며 잠들곤 한 모양이었다. 그 버릇이 우리집에 온 이후에도 내내 남아있었고(내가 집에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 아직도 이유없이 현관에 가 있기를 좋아한다. 이제는 그냥 '영역'이라는 익숙한 공간이 되어버려 습관적으로 그렇게 있는 거겠지만, 항상 괜히 그런 것만은 아닐 것같은 생각이 나는 든다. 그 공간에서 아빠생각을 하며 막연히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다보면 한번씩은 아빠가 오기도 했었으니까. 전남친이 혹시라도 째깐이를 보고싶어하면 나야 언제든지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보내주면야 되겠지만, 째깐이는 어쩐다. 마음이 무겁다. 미안해서 더 많이 예뻐하고 안아주려고 한다.



나중에 나중에, 새아빠가 생기거든 마음을 옮겨주길.


이대로라면 엄마도 장담은 못하겠다만.

작가의 이전글 사소한 부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