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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사소한 부탁

20220908


"도움!!!!!!!!!!!!!!!!!!"



나는 타인에게 뭔가 부탁을 할 일이 거의 없다. 남들보다 비교적 자립심을 키울 수 있는(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자랐던 탓에 웬만한 건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고도 혼자 해결할 수 있고, 되도록 그러려고 노력한다. 빚지는 기분이 드는 게 싫어서이기도 하고.  



정말 사소한 것도 혼자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못하는 걸 수도, 안하는 걸 수도. 전자든 후자든 무능한 건 매 한가지다.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빵 어디에 있어요?" "커피는 어디 있어요?" 하는 인간들이 있다. 빵이나 커피 정도야 안 파는 편의점이 없고 어딜가던 뻔한 곳에 진열되어 있는데도 코딱지만한 가게 한 바퀴 둘러 보는데에 뭐 그리 오래 걸린다고, 찾아 볼 생각도 않고 질문만 존나게 하는 유형. 일단 스스로 먼저 찾아보고 정 못찾겠으면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너만 바쁜거 아니니까.


그래도 이 경우는 그냥 무식한 사람인 거니까, 너보단 유식한 내가 참고 그러려니할 수 있음.



다분한 의도를 품고 일부러 못하는 척 하는 부류가 문제. 동종을 까긴 싫지만 이 경우는 백이면 백 여자이고, 여우짓 스킬의 일종.


"힝. 나는 이런 거 안 해봐서 잘 모루겠엉 ㅠㅅㅠ(표정이 포인트)"


다들 뭔지 알지? 이 문장에서의 '이런 거'라함은 대부분 기계에 관련된 것들이거나, 청소와 요리 준비 같은 허드렛일 따위의 것들. 이건 의외로 꼭 남자 앞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자 사이에서 이걸 써 먹으면 상대가 착하고 순진하다는 필요조건 하에, 하기 싫은 일을 매 번 피해가는 것도 쌉가능하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이 상습범이고, 매우 악질이다. 이 스킬이 특기인 여자 1번이 착하고 모두를 잘 챙기는 여자 2번에게 항상 그런 식이었는데, 제 3자 입장에서 볼 때 시발 꼭 뭔 주인아가씨와 몸종 같았다. 그 날도 핸드폰을 보다가 뭘 못하겠다며 징징거리자 당연하다는 듯이 여자 2번이 그 간단한 조작도 대신 해 주더라고. 옆에서 보고 있기 좆같아서, "야, 이거 뭐 븅신도 아니고. 겨우 그런 것도 못하면서 너는 어디가서 대학 나왔다고 하지도 마, 쪽팔린 줄 알아야지."라고 한 마디 던졌다. 여자 1번은 급정색하며 그 날부터 나를 피했다.



사소한 부탁.



사소한.



부탁.



'사소'하다는 가벼움과 '부탁'의 무게감.



'사소한 부탁'이라는게 뭘까. 부탁은 이미 부탁이기 때문에 결코 사소한게 아닌데. 본인한테는 사소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예를 들면,



* 나는 밤에 출근해서 점심에 퇴근한단 말이지. 아무리 내가 오너로 있는 가게라 해도 퇴근하고 나면 업무와 관련된 전화는 받고 싶지가 않다. 어쩔 수 없는 정말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며칠 전에는 대자연의 섭리 덕에 그 날따라 너무 피곤해서 집에 오자마자 누웠다. 낮잠 좀 자고 있는데 오후타임 근무자인 이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택배용지를 갈았는데 뚜껑이 안 닫힌단다.


"...그럼 용지를 제대로 안 끼우셨겠죠."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해 봤는데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으니 잠깐 나와서 좀 봐달라셨다. 손님이 택배 접수하다가 송장이 안나와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 잔잔한 피꺼솟.




짜증이 난 포인트가 뭐냐면,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거다. 택배용지를 갈 때마다 나를 호출하셨다. 경력이 몇 년인데 아직도 이걸 못 하실까. 매 번 설명드려도 그 때마다 매 번 어려워 하셨다. 연세가 있으시니 그동안은 그러려니 하고 참았지만, 겨우 이거 가지고 밤새 근무하고 퇴근한 내가 자다가 일어나 옷 줏어 입고 나갈 일인가. 그래서 처음으로 솔직히 말씀드렸다. 택배 접수 받아 봐야 나한테 몇 푼이나 떨어진다고, 그거 벌겠다고 자다 깨서 나갈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손님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시라. 일단 오늘은 '접수 불가'라고 써 붙여 놓고 택배기는 그냥 꺼놔주시라. 내가 이따 출근해서 해결해 놓을테니.



화가 나서 잠은 이미 다 깼다. 깬 김에 그냥 나가서 해주고 왔어도 됐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모님이 나한테 미안해 하셨으면 했거든. 지금까지는 그게 미안한 일인 줄 모르셨던 것 같아서.



장사에서 인건비를 쓴 다는 건, 내가 부재하는 동안 나와 동등한 역할을 해줘야 함을 의미한다. 본인의 역량부족으로인해 나에게 영업적 손해를 주고 있다는 걸 인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저 정도면 내 딴에는 굉장히 좋게 좋게 돌려 말한거다. 그리고 혹시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 싶어 덧붙이자면, 가끔의 이런 실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매장에서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몇 분 후에 카톡이 왔다.


'지은씨, 택배 성공 했어요.'


거 봐. 어차피 내가 없었어도 가능했던 거잖아. 왜 꼭 싫은 소리를 들어야만 해결 능력이 생기는 거냐고.



* 맹히씨는 안 쓰는 손목시계가 있으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안 쓰는 손목시계가 있지만 엄마가 쓸 만한 게 아니었다. 환갑이 넘었는데 쥐샥은 좀. 그리고 내 껀데? 안 쓰면 주기 싫은데도 줘야되는 거임?


이건 사실 맹히씨의 뻔한 수법이다. 뭐가 필요하다고 슬쩍 흘린다는 건 그것 좀 사달라는 거. 차라리 그냥 쿨하게 사달라고 하면 얄밉지라도 않지, 매 번 이런 식. 필요하면 본인이 사면 되지, 시계가 뭐 얼마나 한다고. 맹히씨는 무직의 가정주부가 아니다. 프리랜서로 노래 강사 일을 하고 있으며, 인센티브도 은근 쏠쏠히 있다. 나는 내가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건 다 내가 번 돈으로 사니까 누구한테 뭘 사달라고 해 본 적이 없어서, 아무리 엄마라도 이런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빈도가 너무 잦다. 귀엽게 봐 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이런 식이면 정말 연락오는 것도 불편해진다고.


결국 14만원짜리 스와치 사 보냄. 효녀 났다.



* 고양이 문제로도 종종 여러 부탁을 받는다. 밥주는 애가 다쳐서 어쩌고, 키우는 애가 아파서 저쩌고. 병원을 가. 나보고 어쩌라고. 차라리 구체적으로 어떤 요구(내가 해결하라는 뜻, 당연히 거절)를 하지도 못 할거라면 그냥 말도 안 꺼냈으면 좋겠다. 내 마음만 어지러워지잖아. 나에게 고양이에 대한 부탁을 하는 건 존나 반칙이지. 그렇다보니 말을 꺼낸 그 사람이 아니라 그 고양이가 마음에 걸려 최대한 거절않고 상담은 해 준다. 하지만 열심히 상담해 줘 봤자 내 말을 듣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애초에 마음부터가 달랐던 탓이겠지. 정말 애가 탔으면 나에게 전화할 시간에 가까운 병원부터 뛰어갔겠지.



내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인 건 딱히 아니다. 그 동안의 글에서 느꼈을지 몰라도, 나는 무례한 사람에게 얼마든지 더 무례할 수 있는 사람임. 하지만 나부터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만 도움을 요청하기에 내 관점에서는 누군가 나한테 부탁을 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본인의 선에서 해결이 안됐으니까 오죽하면 나에게 부탁을 했겠거니 싶어 대부분은 일단 도와주려고는 한다. 해봐야 그리 어려운 부탁들도 아니니까.


어려운 부탁이 아니니까 돕지만, 그래서 빡침.



'사소한 부탁'이라는 건 없다.


나에게는 '부탁'이란 것 부터가 이미 사소하지가 않다.



이왕이면 쉽고 빠르게 가고 싶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애지간하면 스스로 해결하려고 먼저 시도라도 해 보길.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 대충 찾아만 봐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루트가 뭐가 됐든 얼마든지 다 나온다. 내가 해보니, 부탁 같은 거 없이도 충분히 살아가는데에 지장이 없다.


'부탁'이라고 부를만 한 자격이 충분한 부탁만 해 주길 내가 '부탁'한다.



애도 아니고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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