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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제목없음

20221015


신매탄아파트에 살았을 때니까 아마 유치원때, 많아봐야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거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일로 그날 집에 혼자있었다. 늦지않은 오후시간 쯤이었던것 같고.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몇가지의 포인를 제외하고는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혼자 집에 있으려니 좀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아마 그렇게 혼자 있어본게 처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가족 중 누군가 얼른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렸던거보면, 어른들에게 무언가 바쁜일이 있던것일테고 금방 올테니 잠깐만 혼자 놀고있으라고 했었겠지. 아무튼 아이는 갇힌 공간안에 혼자 있기가 더 무서워서 현관문을 열어놓고 집앞 복도 계단에 앉아있었다. 집은 1층이었고 시간은 대낮이었으니 들리는 바깥소리와 간간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게 훨씬 나았다.



계단에 멍하니 앉아서 조금 심심해 하고 있을때 지나가던 낯선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정확한 내용은 역시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맥락상 너 이집에 사니? 왜 혼자 밖에 있니? 엄마아빠는 어디가시고? 이런 말들이었을거다. 어린아이에게나 아저씨였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삼십대 정도의 남자였으리라고 추측된다. 아이에게는 삼촌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어른이 걱정해주니 반갑기도 하고 조금은 안심도 됐을거다. 유치원에서부터 질리게 들었던 '나쁜 아저씨가 사탕준다고 그러면 절대 따라가면 안돼'라는 말에서의 '나쁜 아저씨'도 아닌 것 같았고, 사탕이 아니라 초코렛을 줬고, 아저씨가 어디 같이 가자고 데려가는게 아니라 우리집에서 엄마 올때까지 같이 있어준다고 했던거니까 경계심도 크지 않았겠지. 이런 추측이 난무한 기억속에서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 한가지는 그 초코렛이었다. 그런걸보면 어린이가 생각해도 그걸 받았던 걸 많이 후회했었나보다. 노란색 비닐 포장지에 담긴, 속에 '땅콩'이 들어있던 알록달록 동그란 그 초코렛. 다행히 요즘엔 이 과자를 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 다음의 기억은 죽도록 소리질렀던 것.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발버둥을 쳤던것도 같다. 남자는 그 입을 틀어막고 힘으로 몸을 제압하려 했지만 아이는 본능적으로 악을 쓰며 울어댔다. 살면서 그렇게나 비명을 질러본건 아마 그 순간밖에 없었을 거다. 몹시 당황한 그 사람은 도저히 안돼겠다 싶었는지, 일어나 옷을 추스리고 급하게 도망쳤다.




그때 마주쳤던 눈빛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정도의 당황스러운 모습을 나는 그후로 누구에게서도 본적이 없었다. 그 눈이 무슨뜻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 나쁜 마음을 먹었었는데 눈을 마주치는 순간 아이의 두려움이 보여서, 이건 아니라는 걸 정말 나쁜 일이 벌어지기 전에 깨달은 눈이었을까. 아니면 이렇게 큰 소리를 밖의 누군가가 듣는다면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을테니 여기서 포기할까 하는 갈등의 눈이었을까.



그 남자가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도망쳤던 결정적인 이유가 전자일까, 후자일까.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쨌든 결국엔 아이가 당하지는 않은 것이니 그 이유가 뭐던 고것이 뭣이 중헌디. 하는 생각을 하시려나.



아이는 다시 홀로 남겨져 서럽게도 울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울다 지쳐있을때 가족 중 누군가가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진 기억은, 그날 밤 잠에 들 때 옆에 누워있던 엄마가, 아까 엄마한테 말한 것 말고 다른 일은 더 없었냐고 조용히 물어보았고, 사실은 더 있었다고 했다. 아저씨가 아랫도리를 벗겼었다고. 어렸지만서도, 어느곳보다 안전한 엄마품에서 하는 이야기인데도 그말을 하기가 그렇게도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그땐 어려서 몰랐지만, 그말을 듣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던 아이는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쓰지않던 색의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스케치북 맨 뒷장같은, 흰 도화지가 아닌 곳에 몰래 그렸다. 그림 중 기억나는 건, 발가벗은 나와 나를 향해있는 주사기들. (주사기가 아이들에게 꽤나 무서운 존재이긴 한가보다.) 나는 그런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의 허술한 비밀을 어른 중 누구도 알지 못했을거라 확신할 수 없다. 보았던, 보지못했던, 보고도 몰랐던간에 기억나는 피드백은 없었다. 당시의 보호자가 그 사건에 대해 어떠한 대처나 후처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어쩌면 납득이 되기도 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당한"건 아니었고, 일을 키우기엔 그 시대엔 지금보다도 쉬쉬하는 문제였을테고, 책이든 병원이든 도움을 받을만한 루트가 있기나 했었을지 의문. 요즘 시대에 벌어진 일이었대도, 대다수의 부모들은 어린아이니까 기억에서 자연스레 잊혀지겠지라며 없던 일로 덮기 바쁘지 않을까.



어른들의 생각처럼 그랬으면 좋았겠지.



 


언젠가부터 나는 땅콩을 못먹었다. 땅콩은 마침 알러지성 음식이라 있지도 않은 알러지로 핑계를 대기가 편했다. 그러니까, 알러지가 있는 건 아닌데, 정확히는 없는것도 아닌 상태. 아니, 알러지라면 알러지 반응일 만큼 심할때는 땅콩을 연상만 해도 속이 메스꺼워진다.





나는 성폭행을 당한것이 아니라 단순 강간 '미수'에 그친 일을 겪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때의 일은 땅콩에 대한 편식을 넘어 여자로써의 나의 정체성에도 확실한 흉터를 남겼다.



일례로, 나는 섹스에 흥미가 없다. 여자의 생애에서 성욕이 가장 강하다고 하는 삼십대에 뻐킹 무성욕자라니. (나는 지금 일종의 커밍아웃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나 혼자는 매우 괜찮지만, 연애중일 때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 동안의 연애에서 상대방과의 관계에 그게 큰 방해가 됐었다는걸 부정할 수 없다. 파트너가 원하는 만큼은 못되더라도 노력은 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행위 자체에 늘 의무감을 가졌다. 그럼 원하지도 않는 걸 억지로 해왔느냐고? 나에게 원하고 or 원치 않고의 문제는 상대를 위해 의무감이 샘솟는 것과, 의무감 조차도 갖기 싫은 기분 사이의 문제였다. 그래서 억지로는 아니나, 스스로의 욕구가 있어서는 아니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의무에 부담이 느껴질땐 확실하게 거절했고, 사실상 거절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걸 인정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매우 다행히도,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관계를 요구를 당한 적은 그 사건 이후로 없었다. 실제로 강간을 당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앞에 나 정도의 일은 명함도 못내밀겠지만, 혹시라도 그런 강제적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눈빛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 (그러면 망설임없이 불알을 터뜨려야지.)


안타깝게도 이 문제는 당연히 헤어짐의 분명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뭐, 억울했겠지. 알고 만났을 리도 없었고, 문제를 인지했을 때에도 나는 이런걸 설명하지 않았다. 이유를 말했었더라면 함께 해결해 볼수도 있었을까. 그런다고 해결이 되기는 할까. 어쨌든 그래서 헤어지는거라면 차라리 헤어지는게 나았다. 굳이 따지자면 '결함'이 있는 내 쪽이 미안해야 하는 입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미투'가 한창일 때 구남친은 뉴스를 보며 피해자들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게 응당한 반응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바로 옆에는 내가 앉아있었다.



이제서 나도 쓴 '미투'의 본질. 운이 참 나빠서, 잘못된 선택을 해서, 혹은 노출 등으로 '위험을 자초해서' 이런 일을 겪는게 아니라는걸 말하고 싶었다.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지극히 한정적인 특정인일거라는 생각은 현실을 모르는 남자들의 착각이다. 성추행을 한번도 겪어본적 없는 성인 여자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이 글을 쓰며 떠오른 나의 또 다른 에피소드들만 모아도 장편의 연재가 가능할 정도로 자라면서 여러번을 겪었다. 저 이야기는 나의 성적 수치심에 관한 역사의 고작 시작을 썼을 뿐이다.



말하지 않으면 알수 없는 것들. 하지만 말할수 없는 것들. 생물학적인 차이로 인해 상이한 경험을 가지며 살았을 서로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성인 너희들은 밤길이 무서워 본적이 있느냐. 혼자 걸을때 뒷사람의 발소리에도 긴장한적이 있느냐. 집에 도착해 문을 열기 전 주위를 살핀적이 있느냐는 말이다. 그날 어린 나를 지킨건 오직 내 자신의 목소리 뿐이었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 여자로 태어났다는것 자체가 핸디캡이라는 걸. 남자는 그렇게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치트키를 쓰고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나와 마주했던 그 눈빛이 진정 범죄 발각에 대한 두려움이었을지,


아니면 일말의 인간성이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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