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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록달록 Dec 24. 2022

오만원

20221026


그냥 왠지 모르게, 갑자기 괜히 안하던짓 하고싶은 그런 날이 있잖아. 그날이 딱 그랬다.



내 기억에 가게 2년차 쯤이었을거다. 퇴근하고나서 미용실 좀 다녀오느라 평소보다 집에 늦게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오후 네시쯤. 우리가게 맞은편쪽에 있는 일식집(ㅇㅊㅊ) 사장언니가 지나가는 나를 보고는 급하게 뛰어나오셨다. 인사를 했더니 다짜고짜 이따 뭐하냐고 물어보더라. 어... 집에 가는데요? 라고하니까 그럼 와서 몇시간만 알바 좀 해달라고 했다. 직원이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가있느라고 일손이 부족하단다. 하필이면 당일 저녁 첫타임부터 단체손님 예약이 30인분이나 잡혀있었고, 인력사무소에서 일당을 부르기에도 시간적으로 많이 촉박한것 같았다.



갑작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잠깐 내적 갈등을 하긴 했었다. 이제 집에가서 집안일 하고 쉬어야 내일 또 출근하는데. 이 언니와는 그리 친분이 있던것도 아녔지만, 같은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남일같지가 않았다. 겨우 직원 한명이 부족해서 30인 회식 예약건을 예약 1시간 전에 취소하는 것도 당장의 손해보다 장기적으로 보면 더 큰 손해인데. 오죽 급했으면 지나가는 나에게 부탁을 다 하셨을까. 가만, 내가 홀서빙 알바를 해 본적이 있었나? 음. 별일 다 해봤지만서도 생각해보니 홀서빙은 제대로 해 본적이 없네. 근데 뭐 30인 테이블 쯤은 명절날의 식사시간 정도이지않을까. 우리 집안은 종가집이었으니까. 하여간 크게 어려울건 없을것 같은데. 그리고 내가 편순이인줄 알고도 급해서 부탁하신거니까 어차피 기대치가 크지 않으시겠지. 할수있는 만큼만 도와드리면 되겠지? 근데 거기서 일하다가 우리 단골 마주치면 어떡하지? 하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런가보다 하겠지 뭐.



그런거 다 상관없이 이상하게 싫지 않은데? 와이낫?



"정확히 몇시간 정도가 필요하세요? 제가 내일도 새벽에 출근이라 길게는 못하는데..."  



단체 예약시간 기준으로 대충 3시간 정도만이라도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하셨다. 내가 안되면 다른 아는 친구들이라도 불러줄 수 있냐면서, 시간당 만 오천원(!) 주시겠다고 구체적인 딜을 제시.



"세시간 정도면 제가 할 수 있는데, 경력 없어도 괜찮아요?"



"콜!!!"



그렇게 순식간에 단기알바가 성사됐다. 다만 집에 고양이가 있어서 당장 영업준비까지는 못도와드리고, 애들 밥 챙겨주고 똥 좀 치우고나서 5시에 맞춰 다시 나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동네서 제일 쿨한 그 언니는 편한대로 하라고, 도와주는 것만해도 고맙다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집에 들러 고양이들을 얼른 챙기고, 일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조금 일찍 출근(?)을 했다. 아직 예약 손님들이 오기 전이라 셋팅부터 도왔다. 막상 하겠다고는 했는데 이곳 시스템을 전혀 모르니 괜히 나때문에 일만 더 만드는건 아닐지 걱정도 됐다. 다행히 다른 직원들도 우리가게에 오시던 분들이라, 아는 얼굴이 일터에서 보이니까 반가우셨는지 친근하게 알려주셨다. 주방 이모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늘 담배를 사가시는,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정감있는 타입이었고, 실장님은 굉장히 과묵한 편이라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가끔 횟감이 남으면 뼈를 발라 뒷문에서 기다리는 고양이들에게 던져주곤 한다는걸 그전부터 동네사람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단체손님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하더니 예약 테이블은 금새 만석이 됐다.



초반에는 코스가 나오는대로 차리기만 하면되서 어려울게 없었다. 내어주시는대로 가져다 놔드리기만 하면 됐다. 그러다가 술이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오르자 점점 요청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여기 소주 3병 더!"



"간장이랑 와사비 추가요~"



뭐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니 조금 헤맸다. 소주를 달라고 했던 테이블이 어디였는지, 간장과 와사비를 달라고 했던 테이블은 또 어디였는지, 그리고 사장언니가 그걸 꺼내주신 위치가 어디인지 잘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부르기도 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있겠냐마는, 홀서빙 쉬운게 아니네 이거. 단체석 이외의 다른 테이블에도 예약이 아닌 일반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일은 더 정신없이 바빠졌다. 아까 화장실을 미리 다녀오길 참 잘 했다고 생각했을 만큼 쉴 틈이 없었다.



이후에 들어온 손님들은 아까 했던 그대로만 하면 되니까 처음보다는 조금 더 속도가 났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됐다. 물론 말이 쉽지, 편의점 일보다는 상대적으로 꽤 동적인 업무라 당연히 힘이 들긴 했다. 그릇도 잔도 조심히 다뤄야 하고. 내 가게도 아니고 남의 가게니까, 사고가 났다는 원래의 그 직원보다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일당값은 해야하지않나 하는 생각에 열심히 했던것 같다. 아니, 오히려 내 가게일을 할때보다도 더 열심히 했다. 어차피 어쩌다 한번인데 하루 피곤한 것 쯤이야.



시끄러웠던 단체석 사람들이 2차로 자리를 옮겼다. 치우는 것도 부지런히 해야 했다. 정리 후 잠깐 숨 좀 돌리고 다시 새로운 손님들로 반 정도 채워질 즈음 시계를 보니 세시간의 빡쎈 노동이 드디어 끝이 났다.



저 시간 됐는데 가도 될까요? 했더니 사장언니는 '아직 바쁜데 더 해주면 안되냐'며 살짝 떠보는 느낌이었다. 내일 새벽에 출근이라 너무 늦어지면 안돼서 죄송하지만 들어가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시간당 만 오천원 주시기로 했었고 세시간 채웠으니 사만 오천원이었지만, 이 쿨한 언니는 역시나 쿨하게 오만원을 쥐어줬다. 짧고도 굵었던 노동의 댓가. 게다가 플러스 알파. 개이득. 나를 맘에 들어하신 눈치. 찡긋.


그리고는 집에 가서 뻗었다.



단 하루의 일시적 투잡만으로도 다음날 출근해서까지 어지간히 피곤하긴 하더라. 이십대였더라면 고작 그거했다고 이정도까지는 아니었을텐데.



그러던 중 오전에 사장언니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어제 일 잘 하길래 혹시 더 해줄 수 있나 해서. 우리 직원이 한동안 입원해야 한다네? 편의점에서 시급 얼마나 주는데? 최저임금이라도 챙겨주디? 거기서 버는 것보다 여기와서 일하는 게 너도 낫지 않겠어? 고정으로 한다고 하면 월급 잘 쳐줄게. 응?"



" . . . "





그랬다. 사장언니는 내가 여기 사장인걸 몰랐던 거다. 나도 언니가 모르는 줄은 몰랐었기에 저 말이 당황스럽고도 웃겼다. 시트콤의 한 장면 같네. 어쩐지. 울 아부지 얘기를 할 때 '니네 사장님'이라고 하더라니. 내 명의의 가게인 것도 모를 뿐더러, 내가 그 '니네 사장님'의 딸인것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굳이 설명하기도 불편해서 그냥 다른 핑계를 댔다. 정 급하시다고 해서 마침 짧은 시간이라 도왔던거고, 말씀은 감사하지만 체력이 좋지않아 장기적으로는 못하겠다고 둘러댔다. 뭐, 사실 그렇게 맘에 없는 말도 아니었지. 이게 다 내가 너무 열심히 일한 탓. 언니는 아쉬워하면서도 또 쿨하게 두번은 안묻고 알았다고, 고마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와 내 가게에 대해 알고 모르고의 여부를 떠나, 저런 제안을 해 준것만 해도 나를 굉장히 좋게 봐주고 예뻐해 주시는 것 같아서 그 어떤 칭찬보다도 감사했다.



일식집 알바 며칠 후였나. 사장언니를 마주쳤는데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미안했다고 하셨다. 뒤늦게 주방이모한테 편의점집 딸내미인걸 들으셨다고. 모르고 그랬던거라면서, 알았으면 그날 그런 부탁 안했을거라고 썩 민망해 하셨다. 이러실까봐 얘기 안한건데. 나는 그날 일한만큼 돈도, 그리고 큰 위안도 받았는데 겨우 그게 뭘 미안하실 일일것까지야.



사실 당시의 나는 내 일에 대해 깊은 회의감이 있을 때였다. 애초에 시작할때부터, 가게가 자리를 잡을때까지만 하다가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면 아부지한테 넘기고 다른일을 찾을 계획이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했다. 솔직히 말해서 열심히 한 건 그다지 아부지를 위해서도 아니었고,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이기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첫 장사이기때문에 서툰것도 당연했고, 그런것치고는 꽤 잘 해왔다는것도 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말을 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부지는 오히려 나를 무시하는 쪽이었다. 가게일로 무언가를 결정할 사안이 생길때면 '니까짓게 뭘 아느냐'며 내 의견은 듣지 않았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더니. 개발팀이 오픈 전 예측했던 데이타보다도 우리 점포가 더 좋은 실적이 나오자 본사측에서는 다점포 운영을 먼저 제안하기도 했었다. 아부지는 그런것도 다 운이라고만 생각했다. 내 덕을 본건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객관적인 성과보다도, 늘어난 수입보다도, 단지 아부지에게 인정받고싶은 욕구가 더 강했다. 하지만 칭찬에 지독히도 인색한 사람에게, 빈말 한번이라도 '수고했다' '고생 많다'라고 말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그걸 기대하는 내 자신이 애처로왔고, 더 이상 열심히 살고 싶지가 않았다. 보람이 없으니 일을 할 맛이 안났다. 그렇게 첫 슬럼프가 왔고, 그 기간은 나에게 중요한 가치관이 무엇인지 알게된 계기가 됐다. 나는 성취감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며, 그 성취감은 좋은 결과나 돈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는 것으로 부터 채워진다는 것.



잠깐의 홀서빙으로 시작된 동네식당 스카웃 정도에 '인정'의 가치를 논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그날 내가 번 돈 오만원은 분명 오만원 이상의 가치를 가졌고, 거절한 제안마저 내가 그토록 목말라하던 격려가 되어주었다.



내 가게 퇴근하고서 남의 장사 도와 준 썰.  



몇년이 지난 최근에 어쩌다가 저 얘기가 나왔었는데, 사장언니는 저 일을 기억도 못하셨다. 끝까지 쥰내 쿨하심. 얼마전 일식집은 문을 닫았다. 리모델링 후, 다음달 초중순 쯤에 막걸리집으로 재오픈 준비중. 저녁장사다보니 이제 나와 마주칠 일은 적겠지만, 분명 잘 되실거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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